매순간이 삶의 선택이다
복숭아 나무가 되실래요. 자두 나무가 되실래요. 오래전 사람들은 복숭아 나무 곁에 자두를 심었다. 병충해는 언제나 자두를 먼저 물어뜯었고 복숭아는 그 틈에서 살아남았다. 자두는 자신이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믿었겠지만 그것은 달콤한 착각이었다. 방패는 먼저 닳아 사라지고 방패의 희생으로 피어난 꽃은 자신이 왜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삶도 똑같다. 누군가는 늘 상처를 대신 받아내며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고 믿지만 결국 변방에서 조용히 스러진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지금 나는 어떤 나무인가.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의 이야기 속 조연으로 쓰이다 지워진다. 내면의 나를 계속 불러내야 한다. 나는 누구의 병충해를 대신 막고 있으며 누구의 욕망 아래 서 있는가. 이 질문을 놓치는 순간 마음의 뿌리는 금세 얕아지고 타인의 불안과 감정이 내 줄기 사이로 스며들어 나를 뒤틀어 버린다. 그래서 삶은 언제나 나에게 요구한다. 너의 중심은 어디에 있느냐고.
어제 친한 언니가 말했다. 사는 게 지루하고 몸도 마음도 무겁고 주변엔 힘들게 하는 사람뿐이라고. 나는 자두와 복숭아 이야기를 들려주며 제발 자두로 살지 말라고 복숭아로 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좋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좋은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흐려졌던 것이다. 눈이 흐려지면 빛과 어둠의 경계를 잃고 결국 어둠을 빛으로 착각한다. 인복은 운이 아니라 안목이다. 흐린 눈에는 늘 흐린 사람이 모인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관계를 모호하게 두는 사람은 착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은 경계가 없는 사람으로 읽힌다. 좋은 사람과 쉬운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피를 흘린다. 그 피는 소리 없이 흐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영혼의 바닥에 검은 흔적을 남긴다. 삶은 그 흔적을 속이지 못한다.
그렇다면 안목은 어디서 생기는가. 지혜는 화려한 통찰이 아니라 자신에게 스며든 상처의 결을 외면하지 않을 때 생긴다. 욕망에 기울어져 있거나 삶에 함몰되어 있으면 지혜가 들어올 틈이 없다. 지혜는 먼지처럼 매일의 작은 고통 사이에서 조용히 내려앉는다. 누구도 대신 알려줄 수 없고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어떤 배움도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초록은 동색이라 한다. 내 곁에 어떤 사람들이 서 있는지 보면 내가 어떤 빛을 품고 어떤 그림자를 안고 살아왔는지 드러난다.
말에는 그 사람의 정신이 깃든다. 정신이 드러나면 본질도 드러난다. 그 본질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떤 나무였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복숭아 나무로 살기로 한다. 누구의 병충해도 대신 받지 않고 내 뿌리를 지키며 내 계절을 살아내는 나무로. 빛만 좇는 나무가 아니라 그림자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단단한 나무로. 바람이 와도 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나무로.
복숭아 나무로 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