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새벽에 문득문득 깬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드는구나 미명의 덩어리가 쑥 올라왔다. 깊은 잠과 얕은 잠의 경계가 조용히 갈라지고 그 틈 사이로 어둠의 잔향이 스며든다. 몸이 먼저 깨고 정신이 그 뒤를 따라오고 맨 마지막에 영혼이 천천히 몸의 온도에 맞춰 돌아온다. 그 시각이면 나는 자연스럽게 영혼의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한다.
낮에는 의식의 흐름대로 살아낸다. 사람들 속에서 요구되는 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하는 나 사회가 기대하는 나 그런 얼굴들을 번갈아 쓰고 벗으며 지나간다. 욕망도 사회적 정서도 낮의 바람 속에서는 조금씩 과장되어 흔들린다. 그러나 본능과 욕망이 사그라들고 모든 표면이 가라앉은 밤이 지나야 나는 비로소 나로 돌아온다.
나는 요즘 나의 원형과 근원에 촛점을 맞추고 살아내고 있다. 원형은 성격이나 습관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들고 온 가장 오래된 결이다. 그 결을 바라보면 마치 고대의 벽화처럼 본래의 문양이 은근히 드러나는 느낌이 든다. 근원은 그보다 더 깊다. 기억으로 설명되지 않고 언어의 닿지 않는 자리 숨결만 남아 있는 오래된 고동 같다. 나는 요즘 그 고동의 소리를 들으려고 마음을 낮춘다.
밖으로 내어뿜는 빛은 언뜻 아름다워 보인다. 사람들은 그 빛을 보고 나를 밝다 하고 단단하다 하고 부드럽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빛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사랑한다. 그림자는 나의 진실이다. 빛이 표면을 비춘다면 그림자는 구조를 드러낸다. 빛은 타인을 향한 나의 얼굴이지만 그림자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고백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너무 깊이 내려가 버린 건 아닐까 두려워 허겁지겁 사다리를 붙잡고 다시 올라온다. 그 순간마다 손끝은 떨리고 심장은 조여오고 현실과 심연의 경계가 흔들린다. 심연은 언제나 공포와 긴장의 손으로 나를 맞는다. 그 손은 어둠 같지만 나를 단번에 침묵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나는 절의 일주문 같은 거대한 문장의 관문을 마주한다. 그 문장은 “너는 너를 아느냐”라는 무시무시한 얼굴이다. 그 앞에서 나는 잠시 고개를 떨군다. 내가 살아온 과거와 현재가 단숨에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를 나라고 알아왔던 모든 현재가 조각조각 부서져 부스러기가 된다. 그 부스러기들은 각질처럼 일어나 내 주변에 떨어진다.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만들어온 얼굴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붙여둔 층들 사랑받기 위해 조금씩 굳혀온 표면들 살아남기 위해 쌓았던 전략의 잔해들. 어느 하나도 나쁜 건 아니지만 어느 하나도 진짜 나는 아니었다.
“너는 너를 아느냐.”
그 거대한 구조물 앞에서 나는 파리한 얼굴로 서 있다. 가장 진실한 질문의 덩어리 앞에 내 영혼이 내려놓여 있다. 그 질문은 나를 심판하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저 영혼의 본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문장은 나를 관통하며 빛을 내었다. 그 빛은 번쩍이지 않고 금빛 실처럼 가늘고 오래된 숨처럼 따뜻하다. 내가 진실한 눈으로 나를 볼 수 있었던 아주 작은 용기에서 나온 빛이었다. 나는 그 빛을 붙잡고 아주 천천히 나를 일으켜 세운다. 변화란 거창하지 않다. 단 하나의 떨리는 눈빛에서 시작된다.
나는 새벽에 문득 깨면 이렇게 나를 알아가는 일로 환희를 배워간다. 그 환희는 화려하지 않고 조용히 심연에서 올라온다. 타인이 준 기쁨도 아니고 세상이 내게 건네는 성취도 아니다. 내가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에만 태어나는 투명한 온기다.
그 온기는 낮의 나를 조금씩 바꾼다. 사람들 사이에서 흔들려도 부서지지 않고 마음의 중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새벽의 나로 돌아갔다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내가 나를 알아가는 그 순간 순간이 고맙다. 나를 아는 일은 오래 걸리는 여정이고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다정한 길이다.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 속에서 나는 나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그 길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