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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다와 깨닫다 사이의 파열음

by 마르치아


처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무지는 어둠이 아니라 정지였고 움직임을 잃은 돌처럼 그저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깨지지 않은 마음은 평온해 보였지만 그 평온은 생명이 아니라 고요의 가장자리였고 나는 그 고요를 나라고 믿으며 오래 머물렀다. 그러나 어느 날 아주 작은 금이 내 안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미세한 파열음이 내 깊은 곳에서 조용히 번져갔고 나는 그 소리를 외면했지만 금은 외면할수록 더 깊고 더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때 나는 알았다. 잔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고라는 것을. 깨다와 깨닫다 사이를 떠다니는 잔상들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에 접어들었다는 신호였고 나는 그 신호를 읽지 못한 채 오래 머물렀다.


삶은 그 뒤로 내 안에 계속 금을 허락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스치듯 지나간 말들 어머니 앞에서 두 손을 모으던 오래된 기도의 냄새 상처받던 날의 숨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며 이유 없이 밀려오던 고독의 잔향 같은 것들이 모두 잔상으로 남았다. 나는 그것들이 나를 흔드는 이유를 몰랐지만 그것들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느꼈다. 잔상들은 소리 없는 전조였고 파열의 문턱이었다. 그 잔상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앎을 바라보았다.


앎은 처음에는 얕았다. 나는 삶을 겉에서 훑는 방식으로 이해했고 사람의 마음을 눈으로만 보려 했고 사랑이라는 말을 소리로만 받았다. 그래도 그것을 앎이라 착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알았다. 앎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순간보다 배이는 시간이 더 길고 더 깊고 더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배다라는 말과 배우다라는 말이 서로 다른 언어처럼 보였지만 그 어둠 속에는 같은 결이 숨겨져 있었다. 배우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스며듦이었고 배이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행위였고 그 흔적은 결국 나의 태도와 마음과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러나 배인 앎은 깊어질수록 무거워졌다. 반복된 경험과 상처와 사랑과 상실이 내 몸의 결에 쌓이고 스며들 때 그 앎은 나를 지탱하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나를 흔드는 무게도 되고 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붙잡고 있던 앎이 사실은 나를 묶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앎이 쌓이면 탑이 된다. 확신의 탑 자존의 탑 사랑의 탑 신념의 탑. 그러나 탑은 탑의 운명을 갖는다. 타로의 타워처럼 언젠가는 무너져야 한다.


그리고 무너짐은 언제나 잔상에서 시작된다. 몸이 먼저 알아채는 파열의 전조 말끝에서 흔들리는 미세한 진동 익숙한 행동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오래된 확신이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해 기울며 생기는 균열 이런 모든 감각들이 잔상으로 나를 감싸며 드디어 탑의 붕괴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잔상은 경고였고 파열의 시작이었고 새로운 길로 건너가기 전 반드시 지나야 하는 문턱이었다.


탑이 무너지는 순간은 조용했다. 나는 큰 소리가 날 줄 알았고 산산이 부서질 줄 알았고 나를 흩어놓을 줄 알았다. 그러나 무너짐은 오히려 깊은 물속에서 들리는 둔탁한 울림처럼 고요하고 완전했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이상하게도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다. 견고했던 모든 것이 부서지는 순간 나는 오히려 늦은 해방을 경험했다. 그동안 나를 지탱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나를 묶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탑이 무너질 때 나는 부서진 것이 아니라 풀려났다.


그러나 무너짐 뒤에 남는 것은 폐허였다. 폐허는 사람이 두려워하던 자리였고 나는 그 잔해들 사이에 서서 내가 가진 모든 앎이 잿더미가 된 것 같은 공포를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그 폐허 한가운데에 서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가벼웠다. 견고했던 것이 사라지고 나니 오히려 공간은 넓어졌고 나는 그 넓음 속에서 자유를 처음 맛보았다. 폐허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숨을 다시 쉬기 시작했다.


그 자리가 바로 공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 그러나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자리. 공은 허무가 아니라 출발이었다. 무너져버린 확신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벼워졌고 그 가벼움은 허무가 아닌 시작이었다. 공의 중심에는 아주 작은 빛이 있었다. 그 빛은 크지 않았고 나를 압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용히 흔들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빛을 붙잡는 순간 빛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 빛을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새로운 나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깨달음이 왔다. 깨달음은 폭발이 아니었고 외침이 아니었고 환희도 아니었다. 깨달음은 스며드는 것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진실이 온몸을 통과하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조각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 억지로 내려 하지 않아도 마음이 스스로 가라앉는 것 어둠이 스스로 물러나고 빛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 깨달음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피어오르는 움직임이었다. 그 움직임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의 결을 바꾸었다.


이 깨달음은 나의 앎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앎은 머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앎은 실천되지 않으면 앎이 아니었다. 실천되지 않은 앎은 지식이었고 지식은 살을 갖지 못한 그림자였다. 앎이 몸에 배어 나의 행동이 될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배운다는 것은 배인다는 것이었고 배인다는 것은 살아낸다는 것이었고 살아낸다는 것은 깨닫는다는 것이었다.


깨달은 뒤 나는 잔상을 다시 돌아보았다. 깨다와 깨닫다 사이에 떠 있던 그 미세한 그림자들. 그 잔상들이 나를 얼마나 멀리 데리고 왔는지 얼마나 깊은 곳으로 데려갔는지 얼마나 아프게 찢었는지 그리고 결국 얼마나 고요하게 살렸는지. 잔상은 상처가 아니라 안내자였고 잔상은 흔적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았다. 깨달음은 밖을 향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안쪽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어둠을 지나면 또 다른 어둠이 있었고 그 어둠을 지나면 더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은 마치 우주처럼 끝이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처음으로 알았다. 깨달음은 나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워내는 것이었다. 비워낼수록 나는 넓어졌고 넓어질수록 나는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나는 그 공간을 우주라 부르기로 했다. 그것은 바깥의 별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새롭게 열리는 공간이었고 그곳은 외롭지 않았고 그곳은 어둡지 않았고 그곳은 침묵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밝은 자리였다. 깨달음의 끝에서 나는 우주를 만났고 그 우주는 다시 나를 처음으로 돌려보내며 말했다. 이제 너는 알았다. 그리고 그 앎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앎은 배인 앎이고 살아낸 앎이고 부서진 뒤에야 온 앎이고 결국 너의 우주가 되어버린 앎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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