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문장 하나가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삶은 뒤돌아보며 이해되지만, 앞으로 나아가며 살아야 한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내 마음에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향이 동시에 일어났다. 하나는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인간의 미련함에 대한 뒤늦은 슬픔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이 두 마음은 서로를 설득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은 채 내 안에서 오래 교차되었고 나는 그 교차 지점에서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뒤를 보는 쪽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지나간 장면을 다시 불러오고 말의 결을 되짚으며 그때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머물렀는지를 곱씹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이해는 늘 늦게 왔고 그 늦음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기보다는 자주 멈추게 했다. 이해되지 않은 채로 지나온 시간들이 내 안에 쌓여 있었고 그것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런 순간마다 과거를 정리하려 하기보다 그 자리에 한 번 더 서보는 쪽을 택해왔다.
다른 이에게 차갑게 이별을 당한 순간도 그런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그 이별은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설명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등을 보았다. 멀어지는 등을 돌아보지 않는 등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붙잡지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등을 돌린 것도 아니었다. 그 장면은 움직임보다는 정지에 가까웠고 나는 그 정지된 시간 속에 오래 머물렀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유독 또렷해진 것은 방향뿐이었다.
그날의 햇살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그러나 그 따뜻함은 위로나 회복의 감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햇살은 내 몸에 부딪히며 엿가락처럼 늘어졌고 시간마저 함께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감각이 길게 늘어지는 동안 나는 서 있는 자세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대로 접힌 종이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야 했다. 주저앉는다는 말은 선택이라기보다 그 순간을 견디는 유일한 형태에 가까웠고 나는 그 형태를 오래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는 동안 “도대체 왜?”라는 질문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이별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그 이유가 끝내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나를 더 깊이 얼어붙게 했다. 질문은 나를 앞으로 데려가지 않았고 오히려 같은 자리를 맴돌게 했다. 생각은 점점 느려졌고 감정은 빠르게 소진되었다. 나는 질문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 질문은 더 이상 나를 움직이게 하지 않았다.
질문이 멈춘 것은 어떤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그 바닥을 짚고 일어난 순간은 “왜”라는 질문이 더 이상 내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던 때였다. 이해해서도 아니었고 납득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질문이 더 이상 나를 붙들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 변화는 생각보다 먼저 몸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 변화를 거부하지 않았다. 일어선다는 행위는 결심이 아니라 반사에 가까웠다.
내가 계속 앉아 있기에는 내 주위에 나 없이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말을 하지 않았고 이유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미 그 자리에 놓여 있었고 나의 개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결국 그것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살아야만 했다. 이 말은 각오의 선언이 아니라 이미 작동하고 있던 상태를 뒤늦게 인식한 문장에 가까웠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그제야 말이 되었고 몸은 이미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넘어진 자리를 계속 뒤돌아보았다.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시선은 자주 뒤에 머물렀고 나는 그 시선을 억지로 거두지 않았다. 그것은 미련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웠다. 한 번 넘어졌던 방식 한 번 멈췄던 이유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로 걷고 있었고 그 미해결의 상태가 오히려 나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를 불안하게 하기보다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삶은 대개 이런 식으로 흘러왔다. 선택은 이해보다 먼저 이루어졌고 이해는 늘 뒤늦게 도착했다. 나는 완전히 이해한 뒤에 움직인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이해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내는 시간이었고 그 상태 자체가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그 문장은 조언이 아니라 내 삶을 뒤늦게 비추는 묘사에 가까웠다. 나는 그 문장을 따라 살았다기보다 이미 그렇게 살아온 시간을 그 문장이 조용히 가리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오늘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하루를 보낸다. 질문은 사라졌지만 의미가 정리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뒤를 본다. 그리고 그 시선을 완전히 거두지 않은 채 앞으로 걷는다. 멈추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멈추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걷고 있다. 이 걷는 상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그 불확실함 속에서 발을 내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