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의 경험에는 얇은 씨실과 날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두툼한 천이 주어지는 삶은 없다. 삶은 대체로 빈 손을 내밀게 하고 아주 가느다란 실 하나를 쥐여 준 뒤 그 실로 시간을 건너보라고 말한다. 사람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모른다. 젊을 때는 더 그렇다. 젊을 때는 실이 아니라 빛을 찾는다. 빠르게 빛나는 성취를 찾고 굵은 줄로 자신을 묶어 세상 앞에 세우려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된다. 빛은 지나가고 굵은 줄은 끊기며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늘 얇디얇은 실 하나라는 사실을.
사람은 그렇게 많은 고통과 관계를 통과한 끝에 결국 얻어낸 것이 얇은 실 하나라는 사실 앞에서 어처구니없이 조용해진다. 얻어냈다는 말도 사실 정확하지 않다. 많은 것은 내가 쥐었다기보다 내 손에서 떨어져 나갔고 나는 남은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사람은 잃어보면서 남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버텨보면서 진짜로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실은 내가 선택한 상이 아니라 삶이 내게 남겨 준 증거다.
우리는 이 얇디얇은 실 하나를 쥐기 위해 그렇게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생을 살아간다. 그 수업료는 돈만이 아니다. 어떤 날은 몸이 수업료가 되고 어떤 날은 잠이 수업료가 되고 어떤 날은 자존심이 수업료가 된다. 어떤 날은 관계가 수업료가 된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흩어지고 믿음이라고 불렀던 것들이 부서지고 남은 날들이 쌓인다. 그렇게 쌓인 날들 사이로 아주 가는 실이 한 번씩 손가락을 스친다. 그때 사람은 그 실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 채 다시 하루를 산다. 그러다 몇 번의 계절이 더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아 그때 내 손가락을 스친 것이 내 삶의 결이었구나 하고.
그 실이 겹쳐지고 겹쳐진다. 겹쳐진다는 것은 축적이기도 하지만 변형이기도 하다. 같은 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실처럼 보이는 다른 실들이 조금씩 덧대어진다. 어느 실은 나를 부드럽게 만들고 어느 실은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어느 실은 나를 조용하게 만들고 어느 실은 나를 예리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 실들을 한꺼번에 의식하지 못한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문득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구나 하고 알아차린다. 그 순간이 바로 무늬가 내 안에서 자리를 잡는 순간이다.
그 실의 직조로 인해 사람 인생의 어떤 방향이 시작된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을 패턴이라 부르려고 했다. 패턴은 반복되는 형태다. 패턴은 습관처럼 굳어진 삶의 모양이다. 패턴이라는 말은 어쩐지 정확해 보인다. 매번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매번 비슷한 방식으로 상처받고 매번 비슷한 방식으로 버티는 나를 보면 그렇다. 나는 늘 같은 방식으로 책임을 떠안고 늘 같은 방식으로 말없이 버티는 편이다. 나는 늘 남들이 외면한 뒤에 남아 정리하는 사람이 되곤 한다. 이런 것들이 내 패턴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망설이게 된다. 패턴이라는 말은 너무 빨리 사람을 굳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패턴이라는 것은 굳어진 형태이기 때문이다. 삶은 한 번의 큰 이슈로도 바뀐다. 삶은 한 번의 깊은 상처로도 방향을 튼다. 삶은 한 번의 만남으로도 다른 결이 된다. 그러니 내가 나를 두고 패턴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이른감이 없잖아 있다. 나는 사람을 단정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조차도.
사실 사람이란 정체 자체가 어떤 한 무늬로 정의할 수는 없다. 사람은 살아가며 여러 얼굴을 가진다. 어떤 자리에서의 나와 다른 자리에서의 나는 분명히 다르다. 같은 말을 듣고도 어떤 날은 웃고 어떤 날은 울며 같은 사건 앞에서도 어떤 날은 담담하고 어떤 날은 무너진다. 사람은 변화한다. 사람은 배운다. 사람은 다치고 다시 배우고 또 다치면서 다르게 배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정체는 완성된 조각상이 아니라 계속 직조되는 직물에 가깝다.
사람이 살다 보면 상처 앞에서 비로소 생기는 무늬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나는 내가 이렇게 무너지기도 하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처음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냉정해질 수도 있구나 하고 당황하는 순간도 있다. 상처는 우리에게 새로운 무늬를 강요한다. 하지만 강요라고 느끼기 전에 우리는 이미 그 무늬를 받아들인다. 상처를 겪고도 이전의 결로만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처는 나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상처는 그저 내 안의 결을 드러낸다. 더 정확히는 내 안에 숨어 있던 결을 밖으로 꺼내 놓는다.
어떤 무늬는 만나는 인연 하나에 흐려지거나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관계 안에서만 강해지고 어떤 관계 안에서만 약해진다. 어떤 관계 안에서만 무례해지고 어떤 관계 안에서만 다정해진다. 그러니 우리가 자주 착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하지만 원래라는 말은 관계 앞에서 자주 힘을 잃는다. 원래라는 말은 혼자 있을 때만 그럴싸하고 인연 앞에서는 자주 흔들린다. 인연은 나를 바꾸려는 의도가 없는데도 나를 바꾼다. 그 변화는 도덕적 교정이 아니라 결의 이동이다.
무늬는 완성되지 않고 계속 덧대지면서 살아진다. 나는 이 ‘살아진다’라는 말이 좋다. 계획해서 만든 무늬가 아니라 살아내다가 생긴 무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무늬는 내가 의지로 만든 것이 아니다. 어떤 무늬는 내가 선택한 성격이 아니다. 어떤 무늬는 그저 내가 버틴 시간이 내게 남긴 문양이다. 그러니 무늬를 두고 누구를 칭찬하거나 누구를 비난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 무늬가 생기기까지 어떤 밤들이 있었는지를.
사람은 살다 보면 이 무늬를 고집하며 나는 이 무늬로 살아왔다는 말이 무색하게 내 무늬가 방향을 트는 인연을 드물게 만나기도 한다. 그런 인연은 대개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조용하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람은 나를 가르치지 않는다. 나를 설득하지 않는다. 나를 꾸짖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앞에서는 내가 나를 과장할 수 없게 된다. 그 앞에서는 내가 가진 가면이 자주 힘을 잃는다. 그 앞에서는 내가 나에게 하던 변명이 얇아진다.
상대는 권유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떤 인연 앞에서 내 무늬의 결이 바뀌고 더 깊은 결로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하는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은 나를 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더 자유롭게 한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속이는 방식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앞에서 더 깊은 결로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깊은 결이라는 것은 거창한 영웅주의가 아니다. 깊은 결은 더 성실해지는 것이다. 더 정직해지는 것이다. 더 쉽게 단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더 쉽게 타인을 도구로 삼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철학가의 말을 하나 붙잡고 싶다. 이 말은 내 삶을 설명하기보다는 내 삶을 조심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키르케고르의 문장이다. “인생은 뒤로 돌아볼 때 이해되지만 앞으로 나아가며 살아야 한다.” 나는 이 문장이 너무 확실해서 오히려 자주 두렵다. 뒤로 돌아보면 나는 분명히 많은 것들을 이해한다. 왜 그때 그 선택을 했는지 왜 그때 그 말을 했는지 왜 그때 그 관계를 놓치지 못했는지 왜 그때 그 슬픔을 끌어안았는지.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내게 숙제다. 이해와 별개로 나는 다시 선택해야 하고 다시 관계해야 하고 다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무늬를 덧대어야 한다.
오십이 넘으니 조금이나마 내 색을 알 것 같은데 나의 무늬도 이렇구나 알아진다. 어떤 날은 그것이 위로가 된다. 이제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생긴다. 이제는 나를 증명하기 위해 내 몸을 태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생긴다. 나는 내가 어떤 결로 세상을 마주하는지 조금씩 알게 된다. 나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살피는지 조금씩 알게 된다. 나는 내가 무엇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내 무늬를 고집하거나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 무늬를 고집하는 순간 나는 다른 결을 만날 기회를 잃는다. 내 무늬를 강요하는 순간 나는 타인의 무늬를 다치게 한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안다에서 멈추고 싶지 않다. 다른 결을 만나서 또 다른 무늬가 되고 싶다. 나는 나를 완성된 사람처럼 부르고 싶지 않다. 완성은 문을 닫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미 나를 알지만 쉽게 단정하고 싶지 않다. 나를 둘러싼 인연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을 한 장면으로 판단하는 것을 경계한다. 사람은 장면이 아니라 시간이다. 사람은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반복된 견딤이다. 사람은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그 실수 뒤에 이어진 고백과 수습과 침묵과 다시 시작이다. 그러니 나는 누군가의 무늬를 볼 때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내 무늬를 볼 때도 그것이 나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거칠면 나는 부드러운 결로 다가가 살며시 덧대는 인연으로 살면 된다. 이 말은 내가 착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내가 상황을 읽겠다는 말이다. 부드러움은 약함이 아니라 기술이다. 부드러움은 관계를 살리는 방식이다. 거친 결 앞에서 거칠어지는 것은 쉽다. 거친 결 앞에서 부드러움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나는 어렵고 싶다. 나는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살리고 싶다.
상대가 조금 연약한 결이면 굵은 결로 덧대어 힘을 주고 싶다. 굵은 결은 함부로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다. 굵은 결은 감당하는 것이다. 대신 서는 것이 아니라 곁에 서는 것이다. 연약한 결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 결이 숨 쉴 수 있게 버텨주는 것이다. 굵은 결은 상대를 눌러 세우는 힘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설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나는 그런 힘을 가지고 싶다. 나는 그런 인연이 되고 싶다.
그러니 나의 무늬는 아직 고착화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패턴이라고 부르기엔 성급하다. 나에게도 인연이 오고 나에게도 상처가 오며 나에게도 어떤 계절은 다시 방향을 틀게 할 것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미리 닫아두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내가 이미 안다고 믿는 것들 위에 너무 편히 눕지 않으려 한다. 나는 여전히 직조 중인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아직도 가장 얇은 실 하나를 제대로 쥐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쥐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너무 얇아서 자주 놓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내 손바닥을 펼쳐본다. 무엇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다시 들어올 수 있는지 비워두기 위해서. 무엇이 나를 바꿀 수 있는지 열어두기 위해서. 무엇이 나를 더 깊은 결로 데려갈 수 있는지 기다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무늬를 지나칠 것이고 누군가가 내 무늬를 스칠 것이다. 그때 나는 예전처럼 단정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다시 묻는 사람이 되려 한다. 나는 아직도 직조 중인지. 나는 아직도 덧대고 있는지.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결을 다치게 하지 않고 곁에 설 수 있는지. 나는 그 질문을 끝내고 싶지 않다. 끝내는 순간 나는 패턴이 되고 나는 닫힌 무늬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열려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