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격

고마움을 알아가는 시간

by 이 경화

어떤 밤은 누웠는데 하루가 정말 충만하고 감사한 일로 가득한 밤이 있고 어떤 밤은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밤이 있다. 나는 그 불편함의 미세하게 엇갈린 감정을 스스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실패한 하루도 아니었고 후회할 만한 선택을 한 날도 아니었다. 오히려 해야 할 일들을 차분히 마쳤고 관계에서도 무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잔여감 때문이었다.



그 잔여감은 분명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슬픔도 아니었고 분노도 아니었다. 마음을 긁는 대신 조용히 눌러앉아 있는 감각에 가까웠다. 눈을 감으면 어둠보다 먼저 낮의 장면들이 스쳤다. 말의 내용보다는 말이 오가지 않았던 순간들. 대화가 끝난 뒤의 침묵. 그 침묵 속에서 드러났던 태도들이 떠올랐다.

사람과 사람의 온도차에서 오는 차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같은 말을 나누고 같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어떤 만남은 체온처럼 오래 남고 어떤 만남은 금세 식어버렸다. 그 차이는 사건의 크기나 대화의 분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태도와 반응의 차이에서 생겨났다. 나는 그 차이를 오랫동안 설명하지 못한 채 감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른 이를 바라볼 때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말의 성실함을 보는 사람도 있고 능력이나 결과를 먼저 살피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그런 기준이 분명한 사람이다. 다만 그 기준은 시간이 흐를수록 달라졌다. 처음에는 말의 완성도를 보았고 다음에는 관계의 지속성을 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함께 시간을 보낸 뒤의 나 자신을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그 만남이 나를 확장시키는지 아니면 조금씩 소모시키는지. 그 차이는 생각보다 분명했다.




말은 형식을 갖추었고 분량도 충분했지만 그 말에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들이 있었다. 눈빛도 표정도 차가운데 텍스트 하나로만 보면 완벽한 말들이었다. 예의도 있었고 요구된 역할도 충실히 수행되었다. 부족함은 없었다. 그러나 그 완벽함 앞에서 나는 자주 멈칫했다.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데도 마음이 닿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먼저 의심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닐까.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해진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같은 장면이 반복될수록 그 의심은 설득력을 잃었다. 불편함은 언제나 같은 결로 돌아왔고 몸은 같은 신호를 보냈다.



말과 태도의 간극이 너무 분명한 사람은 만남 뒤에 공허만 남아 있었다. 함께 나눈 말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지만 그 말들을 건네는 방식에는 머무름이 없었다. 다정함은 형식으로 존재했고 존중은 문장 속에만 남아 있었다. 그 공허함은 실망이나 분노와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기대가 꺾여서 생긴 것이 아니라 애초에 채워진 적이 없어서 남는 감각에 가까웠다.




정교하고 세련된 언어로 포장된 소모의 관계들. 그 관계들을 다시 한번 느낀 날에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은 하루의 피로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낮의 장면을 계속 되짚었다. 말이 놓이지 않은 자리. 침묵 속에서 드러났던 태도. 대화가 끝난 뒤에도 오지 않았던 온기. 그 모든 것이 밤이 깊어질수록 더 또렷해졌다.

그것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날조된 언어로 느껴졌다. 진심이 빠진 자리를 형식이 대신 채우고 말은 관계를 잇기 위한 장치처럼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 언어에는 망설임도 여백도 없었다. 너무 매끄러워서 오히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언어 앞에서 점점 조용해졌다. 말이 많아질수록 감각은 더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특히나 고마움을 전하는 방식의 차이가 크게 다가왔다. 어떤 사람은 고마움을 문장으로 정리했고 어떤 사람은 태도로 남겼다. 말로는 충분히 전달되었지만 그 말이 머무는 시간은 서로 달랐다. 고맙다는 표현이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장치로 쓰일 때도 있었고 아무런 말이 없어도 이미 충분히 전해진 경우도 있었다.

고마움이 소모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 나는 인연을 길게 가져가지 않는다. 감정이 상해서라기보다는 그 관계 안에서 내가 나 자신으로 남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마움이 반복될수록 가벼워지고 표현될수록 가치가 닳아가는 관계에서는 결국 사람이 아니라 기능만 남는다. 나는 그런 상태로 누군가의 곁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고맙다는 표현이 마치 다음 상대에게서 얻어질 무엇을 기대하는 잔여물을 품고 있는 경우 나는 그 불순물이 섞인 고마움을 믿지 않게 되었다. 감사가 끝이 아니라 수단처럼 느껴질 때 그 말은 이미 관계를 떠나 있었다. 고마움이 다음 요청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예열처럼 쓰일 때 나는 그 온도를 감지했다. 그 말이 도착한 자리에 사람이 아니라 계산이 먼저 놓여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고마움을 들을 때보다 고마움 이후의 태도를 더 오래 보게 되었다. 말이 끝난 뒤에도 관계의 무게가 유지되는지.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지. 고마움이 지나간 뒤에도 존중이 남아 있는지를 조용히 살폈다. 그 기준은 사람을 가르는 잣대가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경계가 되었다.

반대로 고맙다는 인사는 단 한마디였지만 그 한마디가 흘러 넘쳐 충만한 때도 있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감사였다. 이유를 덧붙이지 않아도 되었고 다음을 예고하지도 않았다. 그 말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이미 충분하다는 확인처럼 들렸다.




그 한마디에는 여백이 있었다. 말을 건네고 난 뒤 서두르지 않는 태도.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침묵. 고마움을 전한 뒤에도 달라지지 않는 시선과 거리. 나는 그런 순간에 비로소 마음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애써 이해하지 않아도 되었고 경계를 세울 필요도 없었다. 관계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었다.



그런 고마움은 언제나 늦게 남았다. 만남이 끝난 뒤에도 생각나고 시간이 지나도 다시 떠올랐다. 그 말이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이미 충분히 받았다는 고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마다 알게 되었다. 고마움은 많이 말한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자리에서 멈출 때 비로소 온도를 갖는다는 것을.

사람의 격은 대단한 순간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위기나 성취의 장면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결정된다. 특히 고마움을 전하는 순간과 그 이후의 태도에서 가장 분명해진다. 감사가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무엇이 남는지.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을 때에도 태도가 유지되는지. 그 지점에서 사람의 격은 숨김없이 드러난다.

나는 이제 고마움을 표현하고 난 뒤 비로소 그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감사가 끝난 자리에 계산이 남지 않을 때. 더 바랄 것도 더 증명할 것도 없을 때. 그 말 이후에도 나를 그대로 두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나는 그제야 분명히 알게 된다. 그 감각이 관계의 다음을 결정한다.





고마움을 어떻게 전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격이 보인다는 것을 나는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래서 이제는 말이 끝난 뒤의 침묵을 더 오래 남겨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