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10년차가 되어가니, 주변에 정말 좋은 인연들만 남았다. 되도록 소모적인 만남은 줄여가고, 삶을 열심히 살아낸 사람들과 벗하면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얻어진 결과다.
이만큼 이주민들의 이상한 질문을 받곤한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주변 분들이 무엇을 많이 가져다 주세요?" 내 대답은 더 가관이다. "아니 가져다 안주는게 더 이상한거 아닌가요?" 그렇다. 나는 주변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만의 확실하고 단순한 정신이 밑에 깔려 있다. 바로 모든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어떤 물질이든 비 물질이든 우리가 사는동안 잠시 빌려 쓰는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져도, 그것이 자신 하나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아무리 물적 자원이 많다해도 흐르지 않게두면 썩은 물과 같다.
이 모든것들은 돌고 돌아 서로를 숨쉬게 하고 살려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다섯살때까지 나에게 들려주신 할아버지와 가족들의 가르침이다. 우리집에는 항상 선물이 많았다. 그도 그럴것이 받은 선물도 많지만 사람이 집에 찾아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이쁜 손수건을 여러장 사셔서 곱게 포장하고 리본을 묶어서 두셨다. 지워지지 않는 립스틱도 여러개 사셔서 손수 포장해 두셨다. 할아버지는 은단을 그리고 예쁜 성냥을 그렇게 집에 두시며 집에 오시는 분들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는 일이 거의 없으셨다. 그것은 곧 환원의 삶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는 무엇을 받으면 이십프로만 남기고 나머지 팔십프로는 받은 즉시 이웃에 나누어 주셨다. 할아버지 말씀이 팔십프로는 남을위해 이십프로는 자신을 위해 남기는 삶을 몸소 가르쳐 주셨다. 나는 이 가르침대로 오십넘어 실천하고 산다. 무엇을 받으면 그게 다 내 몫이 아니란 생각이다. 그것은 소유가 아니라 일종의 점거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소유는 물질을 가지는것이 아니라 물질을 흐르고 써서 그 너머의 가치와 보람을 가지는 형태를 소유라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다 가지는것 자체가 폭력이다. 당연히 나누고 이것이 흐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높은 깨달음을 얻고 신에게 매일 하소연 하는 삶이라도, 그 작은 실오라기가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는다면 나는 생명이 아니다. 생명을 부여 받은 生者로써 이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과연 살아 있는가. 혹은 멈춰 있는가. 멈춘 것은 언젠가 썩는다. 물도, 관계도, 신념도, 사랑도 그렇다.
흐르지 않는 신앙은 독백이 되고 흐르지 않는 선의는 자기만족이 된다. 흐르지 않는 지식은 오만이 되고 흐르지 않는 재능은 허영이 된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을 의심한다. 이것이 나에게 머물 자격이 있는지, 아니면 나를 통과해야 할 차례인지를 묻는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소유자가 아니라 통로에 가깝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베푼다는 말을 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조금 불편해한다. 베푼다는 말에는 위와 아래가 생기기 쉽다. 대신 나는 나눈다고 말하고 싶다. 나눔에는 높낮이가 없다. 흐름만 있다. 오늘 내가 건넨 것은 언젠가 다른 형태로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그것이 꼭 물질일 필요는 없다. 어떤 날은 웃음으로, 어떤 날은 말없이 건네진 도움으로, 어떤 날은 절묘한 타이밍의 위로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받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받는다는 것은 빚을 지는 일이 아니라 다시 흘려보낼 책임을 맡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받았다는 사실은 곧 다음 사람을 향해 열어두어야 할 문 하나를 가진 셈이다. 그 문을 닫아버리는 순간 자원은 나에게서 생명을 잃는다.
이 섬에서 살며 나는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자연은 한 번도 독점하지 않는다. 바다는 자신을 가두지 않고 숲은 자신을 쌓아두지 않는다. 계절은 돌아가며 역할을 나누고 죽음조차 다음 생을 위한 준비처럼 조용히 자리를 비킨다. 인간만이 자주 움켜쥐고 불안해한다. 부족해질까 두려워 쌓고 또 쌓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쌓인 것들은 삶을 덜 살아 있게 만든다.
나는 풍요를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풍요가 흐르는 자리에 오래 머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차이는 크다. 전자는 언제든 잃을까 불안하지만 후자는 흘려보내도 두렵지 않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이다.
할아버지가 남긴 이십 퍼센트는 계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안전장치였다. 인간이 욕심에 잠기지 않도록 남겨 둔 최소한의 경계선이었다. 그 선을 넘지 않기 위해 할아버지는 늘 먼저 내어놓았다. 나는 이제야 그 지혜를 이해한다. 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덜 묶이는 법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부러 비워 둔다. 공간을, 마음을, 시간의 여백을. 무엇인가 들어올 수 있도록. 그리고 무엇인가 나갈 수 있도록. 내 삶이 막힌 저수지가 아니라 흐르는 물길이 되기를 바라며 산다.
모든 자원은 순환해야 한다. 그것이 물질이든 관계든 신념이든 사랑이든 생명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흐를 때 살아 있고 멈출 때 죽는다. 나는 오늘도 살아 있는 쪽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