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그 사람의 얼을 담는 그릇이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고 설명보다 오래 남는다. 살아온 시간과 통과해 온 선택, 붙들었던 것과 끝내 내려놓은 것들이 차곡차곡 담겨 어느 날 하나의 낯이 된다. 그래서 얼굴은 단순한 외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건너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에 가깝다. 꾸미지 않아도 남고 숨기려 해도 배어 나온다.
이 글에는 두 장의 사진이 있다. 왼쪽의 사진은 오십이 되었음을 기념하며 어느 날 남겨둔 얼굴이다. 아직은 시간을 맞이하는 쪽에 가까웠고 앞에 놓인 날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던 시기의 얼굴이다. 오십이라는 숫자를 통과했다는 안도와 그래도 아직은 괜찮을 것이라는 기대가 표정 어딘가에 남아 있다. 오른쪽의 사진은 현재의 얼굴이다. 기념할 이유도 특별한 명분도 없이 그냥 오늘의 시간 속에서 살아낸 얼굴이다. 시간을 맞이하는 대신 이미 건너온 날들을 감당하는 쪽에 가까운 얼굴이다. 같은 오십 언저리의 얼굴이지만 두 얼굴 사이에는 숫자가 아니라 태도가 놓여 있다.
심상은 면상이다. 그래서 나는 오십이 넘은 지금 내 얼굴을 방치하지 않는다. 이 얼굴은 오늘의 마음이 아니라 그동안의 선택을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를 어떻게 견뎠는지 무엇을 외면했고 무엇을 끝내 받아들였는지가 조용히 쌓여 지금의 낯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얼굴은 어느 날 갑자기 늙지 않는다. 대신 매일 조금씩 방향을 선택한다.
오십 전의 얼굴은 미완의 틀이었고 오십 이후의 얼굴은 점검과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젊은 시절의 얼굴이 가능성과 변명의 영역에 있었다면 지금의 얼굴은 결과의 영역에 놓여 있다. 더 이상 사정 설명이 통하지 않는 얼굴, 살아온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다. 이 나이에 와서 얼굴은 감정의 배출구가 아니라 삶의 요약본이 된다.
얼굴을 가꾸는 일은 오십 전의 시간에 속한다. 미모를 가꾼다는 뜻은 아니다.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 어떤 표정으로 사람을 대했는지 어떤 빛을 얼굴에 남겼는지를 쌓아가는 일이다. 그 시절의 나는 웃음을 연습했고 분노를 삼켰으며 때로는 억울함을 얼굴에서 지워내려 애썼다. 그 모든 시간이 얼굴의 기본값을 만들었다.
오십 이후의 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눈빛은 명조를 잃지 않았는지 낯빛은 흐려진 곳은 없는지 표정은 단정한지 나는 옷 매무새를 여미는 심정으로 매일 내 얼굴을 점검하며 산다. 가꾸기보다 확인에 가깝다. 오늘의 얼굴이 어제의 선택을 배신하지 않았는지 말과 태도가 서로 등을 돌리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평소에는 거의 화장을 하지 않는다. 제주에서 오십을 넘겨 살아온 시간이 나를 그렇게 가르쳤다. 이곳에서는 말보다 얼굴이 먼저 도착하고 자연 앞에서는 꾸밈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 바람과 빛 앞에서 화장은 쉽게 무너지고 태도만 남는다. 덜어낸 얼굴이 오히려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이 섬은 매일 증명한다.
일어나 기도를 마치고 약을 먹고 책상에 앉으면 나는 거울부터 들여다보며 내 낯을 살핀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만나는 타인은 나 자신이다. 오늘의 얼굴이 조급하지 않은지 불필요한 감정이 오래 눌러앉아 있지는 않은지를 조용히 본다. 이 습관은 나를 단정하게 만든다.
사람을 볼 때 가장 먼저 시선이 머무는 곳은 눈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 않는가. 눈을 보면 그 사람 욕망의 출발점을 읽을 수 있다. 무엇을 향해 서 있는지 무엇을 먼저 보고 있는지가 눈에 가장 먼저 드러난다. 말보다 빠르고 표정보다 정직한 곳이 눈이다.
사람이 웃을 때 눈과 하관이 따로 표정을 짓는 사람과는 나는 거리를 둔다. 분명 웃는 소리는 났는데 표정은 웃지 않는 사람, 특히 눈이 웃지 않는 사람과는 이상하게도 결이 맞지 않는다. 웃음이 도착하기 전 이미 다른 계산이 끝난 얼굴을 나는 오래 바라보지 못한다. 그 자리에는 관계보다 목적이 먼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눈빛은 살아 있어야 하고 명징해야 하며 살기가 없어야 한다. 살기가 없다는 것은 무기력하다는 뜻이 아니다. 불필요한 전쟁을 끝냈다는 증거에 가깝다. 명징하다는 것은 세상을 단순하게 본다는 말이 아니라 복잡한 감정을 통과하고도 사람을 사람으로 남겨두는 힘이다.
누군가에게 품었던 미움과 증오가 쌓이면 눈부터 변한다. 그것들은 가장 먼저 시선을 탁하게 만들고 결국 얼굴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분명 표정도 다른 인상도 말씨와 목소리까지 부드러운데 유독 눈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나는 종종 본다. 얼굴은 말하지 않지만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필요에 의해 사람을 자원처럼 관계하려는 이들은 그 눈빛으로 이미 목적을 말한다. 눈이 먼저 목적지에 도착해 있고 관계는 그 다음에 호출된다. 나는 그런 시선 앞에서 한 발 물러선다. 오십 이후의 얼굴은 누구에게 쓰일지 어떤 자리에 놓일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얼굴을 가꾸지 않는다. 대신 점검한다. 오늘의 내가 누군가를 수단으로 보지는 않았는지 나 자신을 소모시키지는 않았는지 이 얼굴로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통과했는지를 확인한다. 분노를 오래 붙들지 않으려 애쓰고 미움을 쌓아두지 않으려 경계한다. 그것들이 눈을 가장 먼저 망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오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결국 이런 뜻일 것이다.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가 내일의 얼굴을 만들고 그 얼굴로 다시 세상을 만난다는 것. 더는 변명할 수 없고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오늘도 이 얼굴로 살아간다. 덜 꾸미고 더 정확하게. 얼굴에 남길 감정을 신중히 고르며 조용히 하루를 통과한다. 이 얼굴이 내 삶을 배신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내가 이 얼굴을 배신하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나이가 들수록 얼굴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한다. 어디까지 왔는지를 묻고 어디까지 견뎠는지를 확인한다. 그래서 이 얼굴은 더 이상 바뀌길 요구받지 않는다. 다만 흐려지지 않기를 무너지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부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