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책을 내고 싶다

by 이 경화


서른두 살 때부터 글을 적었다. 삶이 아플 때도 멈출 때도 다시 일어날 때도 글을 적어왔다. 그간 문장에 버티어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날은 사람보다 문장이 더 믿음직했고 어떤 날은 말 한마디보다 문장 한 줄이 나를 더 오래 붙잡아 주었다. 글을 적는 시간은 정직하게 나와 만나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다.


날것의 나와 마주하는 그 시간이 나는 더없이 고맙다. 잘 정리된 나도 아니고 설명 가능한 나도 아닌 상태 그대로의 나를 문장 앞에 앉혀 두는 일. 그 일은 늘 고되었지만 동시에 숨통이 트이는 일이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여러 번 다른 방식으로 무너졌을 것이다. 대신 나는 문장 안에서 무너졌고 그 덕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살아내며 적어온 글을 가만히 세어 보니 이천 편이 넘었다. 새벽에 적은 것도 있었고 술기운에 적은 것도 있었고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쓰기 어려웠던 날의 글도 있었다. 그 많은 글 중에서 줄이고 줄이고 다시 줄여 오백여 편으로 남겨 두었다. 남겨졌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버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글들이었다.


글은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남은 도구였다.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없었던 감정도 스스로에게조차 이름 붙일 수 없었던 시간도 나는 문장 앞에 내려놓았다. 종종 아무 말도 되지 못한 문장들이 화면 위에 남았고 그마저도 지우지 못한 채 잠들곤 했다. 그러고 나면 다음 날 나는 아주 조금 더 살아 있었다. 글은 해답을 주지 않았지만 다음 날로 넘어갈 다리 하나쯤은 남겨 주었다.


책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이제는 숨기기 어려울 만큼 분명해졌다. 이것은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는 다르다. 잘 썼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도 아니다. 살아온 시간을 증명하려는 의지도 아니다. 다만 이 문장들이 이 생에서만 머물다 사라지기에는 너무 많은 밤을 통과해 왔다는 사실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글은 새벽을 넘겼고 어떤 글은 계절을 건넜으며 어떤 글은 한 사람과의 끝을 통과해 여기까지 왔다.


나는 유행하는 언어로 쓰지 않았다. 잘 팔릴 문장을 계산하지도 않았다. 문단의 각도나 호흡을 전략적으로 조절하지도 않았다. 어디에 기대어 울어야 할지 몰랐던 순간마다 나는 문장을 펼쳐 바닥에 앉았다. 글은 언제나 나를 일으켜 세우기보다는 쓰러진 자리에 함께 앉아 주었다. 그래서 이 문장들은 단정하지 않고 완성되지 않았으며 종종 불편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살아 있다. 매끈하지 않은 문장에는 그 시간을 통과한 몸의 온도가 남아 있다.


서른을 넘기며 배운 것은 단 하나였다. 사람은 설명으로 살아남지 못하고 오직 통과한 시간으로만 남는다는 것. 말로 정리되지 않는 삶도 분명 존재하며 그 삶은 침묵이나 문장으로만 겨우 기록된다. 이 글들은 잘 정리된 인생의 보고서가 아니다. 버티고 무너지고 다시 숨을 고르던 흔적의 더미에 가깝다. 그러니 이 책은 나의 승리담이 아니라 생존기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한 사람의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글을 쓰며 나 자신을 설득하지 않았다. 다만 도망치지 않으려 애썼다. 외면하지 않고 지나온 시간 앞에 앉아 있는 일. 그것이 글쓰기였다. 그래서 이 글들에는 교훈도 위로도 정답도 없다. 대신 한 사람이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문장에 몸을 기대어 왔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이 책을 급히 내고 싶지 않다. 다만 준비된 상태로 만나고 싶다. 원고는 이미 오래전부터 쌓여 왔고 그 사이 나는 더 천천히 살아보는 법을 배웠다. 무엇을 덜어내야 문장이 남는지 어떤 호흡이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는지 이제는 조금 안다. 이 글들은 아직 다듬을 수 있고 기꺼이 다시 태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책은 트렌드를 타기 어렵고 쉽게 분류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문장들이 독자를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조용히 곁에 앉아 시간을 함께 건너간다. 그런 책이 필요한 독자가 분명히 있다. 나는 그 독자를 상정하며 이 원고를 지켜 왔다.


이제는 혼자만 붙들고 있기보다 제대로 된 손을 만나보고 싶다. 문장을 소비하지 않고 다루어 줄 수 있는 사람. 빠르게 판단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읽어 줄 수 있는 사람. 이 글들이 가진 속도를 이해할 수 있는 편집자와 출판사를 찾고 싶다.


만약 이 글을 읽으며 원고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대화를 시작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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