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년간의 견뎌온 기록
이제서야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누군가처럼 오래전부터 품어온 꿈도 아니었고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로 설정해 둔 적도 없었다. 그저 써 왔다. 하루를 견디고 남은 마음을 적었고 말로 하지 못한 것들을 문장으로 옮겼다. 그렇게 쓰다 보니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너무 오래 써 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는 이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문단을 향해 달려온 적이 없다. 작가가 되겠다는 욕망보다 살아내겠다는 감각이 먼저였다. 글은 늘 삶의 뒤편에 붙어 있었고 나는 그저 앞을 향해 하루를 걸어갔다. 그러다 보면 문장이 남았다. 목적 없이 쓴 글들이었지만 그 글들은 사라지지 않고 나와 함께 시간을 건너왔다. 지금 돌아보면 그 점이 이 글들의 가장 큰 특징이자 힘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쓴 지 한 해밖에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수필 하나를 투고한 적이 있다.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 계간지에서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기쁘기보다 당황했다. 너무 빠른 호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 글이 아직 충분히 시간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은사님께 여쭈었다. 은사님은 지금도 시인으로 활동하며 문단의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었다. 은사님은 그 계간지가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고 그런 방식으로 문단에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더구나 계간지 몇 부를 등단이라는 이름으로 작가가 구입해야 하는 조항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은 나를 단번에 현실로 데려왔다. 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고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통과 방식의 문제였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거절을 선택했다.
그 선택 이후로 나는 거의 이십 년 가까이 투고를 하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이 썼다. 다만 그 글들은 발표를 전제로 하지 않았고 나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도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글은 나를 증명하지 않았지만 나를 지탱해 주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 문장은 조용히 쌓였다.
세월이 흘렀고 그 계간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문득문득 그때 그 상을 받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오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회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대신 그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왔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자리였다.
2025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수필을 투고했다. 월간문학이었다. 결과는 두 번의 고배였다. 탈락했다는 사실보다도 아직도 나는 먼 사람인 것만 같다는 감각이 오래 남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전과 달랐다. 그 거리가 나를 꺾지 않았고 다시 쓰게 만들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왜 글을 써 왔는지를.
요즘의 나는 오랜만에 투고라는 말을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다. 파일 이름을 바꾸고 제목을 다시 읽고 메일을 여러 번 확인한 뒤에야 보내기 버튼을 누른다. 그러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출판사 편집자라는 소개와 함께 원고를 읽었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말이 이어진다. 편집장의 질문은 구체적이고 차분하다. 이 글이 왜 지금 의미가 있는지, 어떤 독자에게 닿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오래 쓴 시간 덕분이다.
비슷한 시기에 몇몇 출판사에서 연락이 온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된 말이 있다. 오래 써 온 사람의 글이라는 말.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춘다. 그동안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던 시간이 이제는 문장의 결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분명하다.
이제서야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에 도달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더 이상 조급하지 않고 내 글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지금의 나는 내 문장을 설명할 수 있고 기다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무 출판사와도 책을 내고 싶지 않다. 결이 맞는 출판사를 기다리고 있다. 문장을 앞당기지 않고 시간을 존중하는 곳, 이 글들이 걸어온 속도를 이해해 줄 수 있는 편집자와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싶다.
이 책은 빠르게 소비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대신 오래 쓰인 시간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상도 있었고 거절도 있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시절도 있다. 그 모든 시간을 통과한 문장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를 바란다. 이것은 시작을 알리는 책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써 온 사람의 첫 정리이자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용한 출발이다.
나는 지금, 이십 년의 시간을 한 권으로 건네고 싶다. 그리고 그 책을 함께 만들어 줄 출판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