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견디었더니 애정만 남았다

by 이 경화


나이가 드니 모든 것이 애처롭게 보입니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도 바닷가 바위에 부서지며 사라지는 파도의 포말도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도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그들이 모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존재라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머무는 일이고 사라진다는 것은 예정된 일인데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붙들려 애쓰며 살아가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붙들 수 없는 것들을 붙들려다 상처 입고 놓아야 할 것들을 놓지 못해 더 깊은 상실을 배우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또렷해집니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은 이전과 다른 밀도로 제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빠르다기보다는 얇아졌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물과 사건과 사람이 가진 외피가 얇아지고 그 안에 숨겨진 본질이 자주 드러났습니다. 웃음 뒤에 감춰진 불안과 친절 뒤에 숨어 있는 두려움 그리고 무심한 말 한마디 뒤에 웅크리고 있는 외로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보인다는 것은 알게 된다는 것이고 알게 된다는 것은 쉽게 외면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삶의 슬픔들이 유독 일찍 다가왔던 저는 이 지독한 측은지심이 제 안에 자리 잡게 된 뿌리가 바로 그 경험들에 있다고 느낍니다. 아직 세상을 다 알기도 전에 상실을 먼저 배웠고 기쁨보다 결핍을 먼저 알아버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늘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그것이 언제 사라질지를 먼저 헤아리는 아이였고 웃음보다 침묵에 익숙한 아이였습니다. 슬픔은 저를 일찍 철들게 했고 동시에 오래 아이로 남게 했습니다.

삶은 제게 친절하지 않았지만 대신 질문을 남겼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끝내 놓아주어야 하는가. 그 질문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저는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것입니다. 제 인생의 모토가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애정에서 출발해 측은지심으로 자라나고 다시 애정으로 귀결되는 과정으로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저는 사물을 단정 짓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을 단면으로 보지 않으려 애썼고 그 이면에 무엇이 있었을지를 먼저 상상했습니다. 이해하려는 애정은 자연스럽게 측은지심으로 옮겨갔고 그 측은지심은 다시 사람을 향한 애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반복 속에서 저는 성장했고 그 안에서 저 자신을 조금씩 발견해왔습니다. 단단해졌다고 말하기보다는 부서지기 쉬운 상태로 오래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저도 누군가에게 제 고민을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향한 측은지심이 늘 그것을 가로막습니다. 상대가 저보다 더 안쓰럽게 느껴지다 보니 제 말은 목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제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 사람이 견뎌왔을 시간들이 겹쳐 보이면 제 고통은 자연스레 뒤로 밀려납니다. 그렇게 저는 늘 경청하는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저를 강하다고 말합니다. 잘 견딘다고 말하고 단단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들 속에서 작은 오해를 느낍니다. 견딘다는 것은 강함이 아니라 선택일 때가 많고 침묵은 단단함이 아니라 포기의 다른 이름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강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을 더 보았기 때문에 제 아픔을 뒤로 미뤄두는 선택을 반복해왔을 뿐입니다.



어쩌면 이는 신께서 저에게 주신 훈련일지도 모릅니다. 말하기보다 사유하게 하고 토로하기보다 아뢰게 하는 삶. 사람에게 기대기보다는 신 앞에 앉게 하는 삶. 그렇게 저는 제 질문들을 사람에게 던지지 않고 하늘을 향해 던지게 되었습니다. 답을 바로 받지 못해도 괜찮았습니다.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법을 이미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제게 주어졌고 제가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합니다. 만약 제가 그저 불평만 하며 살았다면 제 삶은 비극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측은지심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며 저는 이해의 폭을 넓히고 사람들의 양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선과 악의 양면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 악과 싸우며 긴장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더 세인트라는 이름으로 삶의 일을 감당하게 된 것도 이 측은지심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삶에서 밀려난 마음들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서성이는 사람들의 시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뿐입니다. 더 세인트는 제게 사업이기보다 태도에 가깝습니다.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외면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가깝습니다. 상처를 해결하려 들기보다 그 곁에 잠시 앉아 함께 숨을 고르는 일 말보다 침묵을 먼저 내어주는 일. 저는 이 이름 아래에서 무엇을 이루기보다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를 더 자주 묻습니다. 더 세인트는 제 삶이 선택해온 방식의 또 다른 이름이며 측은지심이 구체적인 책임으로 옮겨지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제 저는 제 안에 있는 측은지심이 더 깊은 애정으로 발효되기를 바랍니다. 상처로 끝나지 않고 선한 선택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연민이 소모되지 않고 돌봄으로 전환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두 손 모아 그렇게 기도합니다. 제가 끝내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제 마음이 닿는 곳마다 조금 더 따뜻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