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 있다. 막막하게 암울한 현실 앞에서 어딘가에 털어놓기만 해도 그 자체로 마음이 조금은 놓일 것 같은 때 말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괴로운 마음을 고백성사하듯 꺼내놓았을 때 돌아오는 위로는 종종 “괜찮아, 다 나아질 거야”라는 말이다. 그 문장은 위로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때로는 폭력에 가깝다. 괜찮아라는 문장이 주먹이 되어 상대의 마음을 때리는 순간들, 살다 보면 그 장면은 생각보다 자주 반복된다.
상대의 안위와 안녕을 묻는 말에도 “괜찮아?”라는 물음이 가장 먼저 자리한다. 그 말은 배려처럼 들리고 관심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이미 대답의 범위를 정해 버린 질문이기도 하다. 괜찮지 않다고 말했을 때 상대의 온도는 급격히 낮아진다.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대화는 멈칫하고 공기는 미묘하게 식는다. 그 온도 변화는 아주 미세해서 아무도 그것을 무례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상대는 여전히 예의 바르고 대화는 계속되지만 그 순간 이후 같은 말은 더 이상 같은 무게로 오가지 않는다. 나는 이미 한 발 물러난 자리에 서 있고 그제야 알게 된다. 이 질문은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심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그래서 우리는 언제부터 괜찮지 않아도 굳이 괜찮다는 말로 삶을 살아야 했을까. 아프다고 말하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힘들다고 털어놓으면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되는 세계에서 괜찮다는 말은 가장 안전한 선택지가 되었다. 그 말 한마디로 설명을 줄일 수 있고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더 묻지 않아도 되는 평온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 평온의 대가는 늘 말한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괜찮다는 말을 너무 자주 사용하면 오히려 그 문장에서 멀어진 행동들이 흰 행주에 커피가 묻어 있듯 조용히 얼룩으로 남는다. 말은 말끔한데 생활은 점점 어긋난다. 괜찮다고 말한 날들은 유난히 잠이 얕고 설거지가 오래 걸린다. 행주를 몇 번이나 헹구어도 개운해지지 않고 아무 이유 없이 손이 바쁘다. 그 얼룩은 한 번에 드러나지 않는다. 매번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조금씩 스며들어 어느 날에는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된다.
이 어긋남은 결국 피로로 몰려온다. 설명하지 않았던 말들 삼켜 버린 감정들 괜찮다는 말 뒤로 밀어 두었던 마음이 몸부터 먼저 지친다. 그리고 그 피로는 관계를 서서히 부식시킨다. 갑자기 무너지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조금씩 안쪽부터. 괜찮다고 말하며 유지한 관계는 어느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이미 지쳐 있는 관계가 된다.
그래서 나는 괜찮냐고 묻는 대신 밥을 사주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산다. 괜찮다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설명하지 않아도 숟가락을 들면 되는 시간. 밥은 상대를 단정하지 않고 회복을 재촉하지 않는다. 그저 여기까지 잘 왔다고 몸부터 먼저 말해준다.
그래서 오늘 동네에 혼자 사는 언니들을 조용히 초대했다. 괜찮냐고 묻는 대신 삼 일 내내 끓인 곰탕을 대접해 드리려 한다. 아무 대답도 필요 없는 자리에서 그저 국이 식지 않게 불을 보고 수저가 비지 않게 옆에 앉아 있으려고 한다. 말은 줄이고 생활을 내미는 쪽으로. 괜찮지 않아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힘든 일이 있어 마음을 털어놓으면 이번에는 신이 앞에 놓인다. 기도라는 안전한 단어 뒤로 정작 인간은 한 발 물러선다. “기도할게요”라는 말과 함께. 그 말은 정중하고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 순간 기도는 위로가 아니라 거리의 이름이 된다. 손을 내미는 대신 손을 거두는 말, 함께 앉는 대신 상황을 맡기는 말. 신에게 건네졌다는 이유로 사람은 더 이상 거기 있을 필요가 없어진다.
물론 기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기도는 사람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 기도는 사람이 먼저 다가간 뒤에야 비로소 자리를 찾는다. 나는 기도할게요라는 말보다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더 믿게 되었다. 그 믿음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신을 앞세우기 전에 사람 쪽에 먼저 남아 있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괜찮냐고 묻지 않고 기도할게요라고 말하지 않은 채 국을 끓인다. 그 자리에 신도 함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