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는 동안 쓰였다
廻嚮은 불교의 용어다. 수행과 공부를 통해 얻은 공덕과 결과를 자기에게 두지 않고 다시 타인에게 돌리는 행위를 뜻한다. 애써 쌓은 것을 손에 쥐지 않고 흘려보내는 일. 성취했으되 소유하지 않고, 얻었으되 주장하지 않는 태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움켜쥐려는 존재이지만 회향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붙드는 힘을 내려놓고 흘려보내는 힘을 택하는 것. 그러므로 회향은 도덕적 행위이기 이전에 존재의 자세다. 내가 나를 중심에 두지 않는 훈련이며, 세계 안에서 나의 자리를 가볍게 조정하는 일이다.
자연은 늘 그렇게 움직여 왔다. 나무는 꽃을 피우지만 꽃을 붙잡지 않는다. 열매는 익으면 떨어지고, 떨어진 열매는 다시 흙이 된다. 바다는 증발한 물을 다시 구름으로 돌려보내고, 구름은 비가 되어 땅으로 스민다. 아무것도 홀로 소유되지 않고 모든 것은 순환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우리가 순리라 부르는 것은 결국 이 순환의 질서에 대한 겸손한 동의일 것이다. 회향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스스로를 맞추는 행위다.
나는 오십을 넘기며 내 삶의 방향을 “회향 하듯이”라는 문장 위에 걸어 두었다. 젊은 날에는 얻는 것이 사는 것인 줄 알았다. 성취하고 인정받고 내 이름을 남기는 일이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라 여겼다. 그러나 세월은 조용히 나를 다른 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그간 세상에서 배우고 깨닫고 알아진 귀중한 것들이 온전히 나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했다고 믿었던 시간들 속에도 수많은 타인의 손길이 스며 있었고, 운이라 여겼던 사건들 속에도 보이지 않는 배려와 우연의 축복이 얽혀 있었다.
하나도 순수하게 나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가 읽은 책들은 이미 누군가의 사유였고, 내가 먹은 밥은 누군가의 노동이었으며, 내가 버텨낸 시간들조차 누군가의 위로와 기다림 덕분이었다. 그렇게 따져보면 나는 늘 빚진 채로 살아온 셈이다. 대자연이 준 선물, 타인이 건넨 은혜, 이름 모를 존재들의 희생이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삶을 나의 것이라 주장하는 일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겨우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다. 얻은 것은 쌓기 위함이 아니라 흘려보내기 위함이라는 것. 배운 것은 높아지기 위함이 아니라 낮아지기 위함이라는 것. 내가 통과한 고통조차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통로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삶을 통하여 도로 돌려드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부스러기만 한 것일지라도,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내가 받은 것의 일부라도 흘려보내는 삶. 그것이 회향이다.
오십 이후의 삶을 회향 하듯이 살자고 결심하니 시간의 표정이 달라졌다. 매일의 현재가 더 이상 소모해야 할 날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순간으로 다가온다. 찾아와 주는 인연이 선물처럼 느껴지고, 스쳐가는 대화 하나에도 오래된 의미가 스민다. 새롭게 알아차리는 작은 깨달음들마저도 나의 소유가 아니라 다시 건네야 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은 묘하게 가벼워진다.
회향은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적극적인 참여다.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연결되는 방식이다. 내가 얻은 기쁨을 나누고, 내가 통과한 상처를 위로로 바꾸고, 내가 쌓은 경험을 다음 사람의 디딤돌로 놓는 일. 그렇게 생각하니 현재의 고통도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이 또한 언젠가 돌려줄 수 있는 재료가 되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다. 고통은 끝내 남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타인의 어둠을 밝힐 작은 불씨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회향하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날을 생각하면 두려움 대신 가벼움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고, 마지막에도 나의 것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이 몸도, 이 이름도, 이 기억도 언젠가는 흙과 바람과 빛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때 나는 빈손일 것이다. 그러나 그 빈손이야말로 가장 충만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붙들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마저도 하나의 회향처럼 느껴진다. 존재를 다시 우주의 질서에 돌려드리는 마지막 행위.
고단했던 삶이 이토록 기쁠 수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아이러니다. 견디며 살아낸 시간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단단해진 마음이 다시 흘려보내는 법을 배우게 했다. 너른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며 감사할 수 있음이 축복이다. 순환의 질서에 동참하고 있다는 감각, 내가 거대한 흐름의 일부라는 자각. 그것이야말로 나로 사는 일의 본질일 것이다.
어쩌면 신은 인간을 소유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돌려주기 위해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움켜쥐는 존재가 아니라 흘려보내는 존재로. 나의 남은 시간들이 그러하기를 바란다. 회향 하듯이 살다가, 회향 하듯이 떠나는 삶. 그것이 나의 오십 이후의 기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