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이 피던 날

by 이 경화


스물두 살,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라일락 향기가 머물렀다.


그 향은 계절을 타지 않았고,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복학생 선배였다.


겉모습은 다정하고 조용했지만,


세상에 대한 생각은 단단했고,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학교 도서관 구석에서, 오래된 찻집 구석에서,


그리고 봄볕이 스며든 교정 벤치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역사와 철학, 음악과 문학,


무심한 듯 던진 농담에도 웃음이 터졌고


진지한 주제로는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나는 그의 모든 게 좋았다.


그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


사람을 대하는 예의가,


낯선 주제 앞에서 눈빛이 반짝이는 그 순간들이.


나는 그를 사랑했고,


무엇보다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시간은 흘렀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고,


겨울이 두 번 바뀌었다.


그렇게 계절은 순환했지만,


내 마음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해?"


"우리,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때마다 나는 미소로만 답했다.


말은 끝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그는 조금씩 지쳐갔다.


나는 생각했다.


꼭 말로 사랑을 고백해야 하나?


서로의 마음이 전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내 사랑이 말 없이도 전해지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는,


확인을 원했다.


확신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대학원 졸업식에


나와 부모님이 함께 오길 바랐지만


나는 끝내 가지 않았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말 한 마디 없던 마침표로 끝났다.


그때 나는 사랑을 처음 경험했고


처음 잃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 속에서


나는 홀로 버티는 법을 배웠다.


참 많이 울었고


참 오래 그를 그리워했다.


몇 해가 흘렀다.


잊을 만도 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 선배의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다시 마주쳤다.


검은 정장, 차분한 눈빛


그러나 여전히 따뜻했던 그의 미소는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우리는 찻집에 들렀다.


말수가 줄고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차가 식어갈 무렵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한 번쯤은 네가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바랐어.


그때마다 넌 항상 웃기만 했지.


그 미소가 좋아서 기다렸는데


점점 내가 초라해지더라.”


그는 고개를 숙였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시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걸까 싶었어.


그 생각에 자꾸만 나를 의심하게 됐고


결국 널 놓을 수밖에 없었어.”


그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의 입가에는


슬픔인지, 너그러움인지 모를 옅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말로 꺼내어야 닿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지 못한 마음은


때로 상대의 마음을 버티게 해줄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뒤늦은 후회를 삼켰고


그래도 그 모든 망설임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음을 스스로 다독였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조용히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그 후로 매년


라일락 향기가 피어나는 오월이 되면


그가 떠오른다.


그의 웃음과, 그의 말투와,


그리고 그가 지나가던 바람처럼 맴도는 향기까지.


봄과 함께 피어나


여름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진 내 첫사랑.


사랑 가득한 5월


나는 이제 속삭이듯 기도한다.


사랑만 가득하기를.


이제는 말로도, 마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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