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무대
"이번 생의 삶이란 무대 위에서 나는 어떤 역할로 서 있어야 할까".
누군가는 주인공으로 누군가는 조연으로 또 어떤 이는 조명 뒤 어둠 속에서 자신만의 장면을 살아낸다. 나의 무대는 언제나 찬란하지 않았고 내 역할은 주목받는 인물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드는 존재였다. 그러나 바로 그 조용한 자리에 진심을 눌러 담으며 나는 내가 누구인지 이 무대에 왜 서 있는지를 매일 새로이 확인해왔다.
무대 위에서 나는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단지 즐거움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울음의 뿌리에서 길러진 것이었다. 웃음은 나의 아픔과 맞닿아 있었고 그 감정은 외워진 대사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지나온 시간 깊은 밤의 침묵 속에서 홀로 쏟아낸 눈물 사랑 앞에서 한 발 물러서야 했던 고백 외로움에 몸을 기대고 기도하던 무수한 새벽들. 그 모든 시간들이 배역 안에 스며들었고 그 덕에 나는 단지 연기자가 아니라 진짜 삶을 살아내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맡았던 인물들은 대개 화려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복잡한 줄거리로 꾸며지지도 않았고 조명을 독차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작은 배역들 속에도 얼마나 많은 침묵과 갈등 단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는 소망이 깃들어 있었는지를. 관객은 웃었고 웃음은 흘러갔지만 나는 그 웃음 사이사이에 스며 있는 오래된 눈물의 온기를 느끼며 그 순간들을 연민으로 감싸 전하고자 애썼다.
삶은 어쩌면 연기의 연속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다양한 장면 속에서 수많은 배역을 살아낸다. 어떤 이는 어머니로 또 다른 이는 친구이자 동료로 혹은 낯선 타인의 하루를 스쳐 지나가는 지나가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중요한 건 그 배역의 크기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자리를 얼마나 성실하게 얼마나 진심으로 감당해냈는가이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의 자세가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흔적일 것이다.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생의 무대 위에서 나는 어떤 기억으로 남고 싶은가. 어떤 장면에서 어떤 눈빛으로 누구의 마음을 흔들고 나오는 사람이었는가. 나는 빛나는 주연보다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잔잔하게 남는 장면 하나가 되고 싶다. 조명이 꺼진 뒤에도 마음속에서 계속 재생되는 한 컷 한 대사.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당신의 이야기도 무대 위에 올려질 자격이 있다"고 건네는 조용한 한 줄의 대사였기를 바란다. 그 말 한마디가 삶을 이어주기도 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무대에 선다. 또 다른 삶의 배역으로 또 다른 장면 속에서. 살아내는 연기를 위해 아니—연기를 넘어선 진짜 삶을 살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