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오페라 코치 선생님을 학교로 모시기 위해 페루지아에서 북쪽 도시, 노비 리구레로 향했다. 낯선 도시를 향하는 마음엔 설렘과 기대가 고스란히 얹혀 있었지만 베니스에서부터 이어진 일정이 너무 타이트해서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 빡빡한 하루를 감당해야 했다. 가는 내내 비가 내렸다. 갑상선이 없는 나는 평소보다 더 피로감을 느꼈고 거센 빗소리에 네비게이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아 소리를 키우다 보니 신경이 점점 예민해졌다. 그날따라 이탈리아어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렸다. 내 예민함을 눈치챈 그는 이따금 눈을 마주치고 손을 가볍게 잡아주며 “괜찮아요?” 하고 물어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 다정한 눈빛과 손길에 나는 이내 마음이 진정되었다.
살면서 ‘괜찮냐’는 한마디에 담긴 염려와 존중의 무게를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어떤 이는 그 단순한 물음 하나로 불안하던 마음이 잠잠해진다. 그는 언제나 눈빛과 깊은 호흡으로 내 안부를 세심하게 살폈고 나는 그 작은 배려들 속에서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게다가 오늘처럼 흐리고 눅눅한 날씨엔 익숙한 영어조차 낯설어지는 기분이었다. 인터뷰를 영어로 진행해야 했기에 더욱 긴장되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우리는 햄버거 가게에서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첫인상이 이토록 강렬한 경우도 드물다. 몇 마디 말보다 훨씬 많은 것을 그분의 태도와 눈빛, 몸짓과 웃음이 먼저 말해주었다. 아우라는 말로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다. 풍부한 표정과 제스처, 주름 하나에도 삶의 깊이가 스며 있었다.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존경심은 자연스레 피어올랐다.
인터뷰가 끝난 뒤 나는 지친 얼굴로 그에게 제안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딱 하루만 여기 머물면 좋겠어요.” 그도 피곤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숙소를 잡고 근처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도 지쳐 있었지만 나를 먼저 챙기기 시작했다. 그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져 나는 그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참새처럼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대화를 나눌 기운은 없었지만, 때론 말보다 행동이, 행동보다 마음이 먼저 전해질 때가 있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은 싹튼다.
다정한 그는 해산물을 잘라 내 접시에 놓아주었고 나는 그의 스프에 후추를 살짝 뿌려주었다. 어느새 비는 멎고 내 컨디션도 한결 나아졌다. 밥을 먹다 돌체를 즐기던 중, 그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나한테 의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있었어요?”
나는 잔을 들던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제였을까요… 딱 어떤 순간이라고 말하긴 어려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가 내게 기대어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이 내 감정에 따라 흔들리지 않을 때요. 내가 무너지든, 화를 내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때. 그럴 때 나는 당신이 내 옆에 있다는 걸 실감하고, 그게 의지할 수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안정감이 사랑일까요?” 나는 잔을 내려놓고 잠시 시선을 멈춘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사랑 자체라기보다는, 사랑이 자라나는 공간 같아요. 정확히는 사랑이 숨 쉴 수 있는 공기. 그게 없으면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좋아해도, 결국 숨막혀서 사랑은 시들죠.” 당신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사랑은 뭔데요?” 나는 그 질문에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을 바라보며 저 멀리 아직도 젖어 있는 돌바닥의 반짝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사랑은요… 타인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이에요. 나와 너무 다른 그 세계를, 통제하지 않고 바꾸려 하지 않으면서, 그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나와 함께 걸어줄 거라는 희망을 품는 일.”
“어쩌면 사랑은… 자기 혼자만의 열정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조심스럽게 놓여진 ‘허락’인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나를 내어주고, 당신이 당신을 내어주고, 그 사이에 작은 불씨 하나 놓이는 것. 그게 자라나면 사랑이 되겠죠. 하지만 그건 언제든 꺼질 수도 있고, 또다시 피어날 수도 있는 불꽃이니까.” 당신은 조금 숙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우리 사이에도 그런 불씨가 있는 걸까요?”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있어요. 나는 당신이 내 마음의 어떤 부분에 도달해 있다는 걸 알아요. 그건 아무에게나 열어주지 않는 자리예요. 그리고 거기까지 다녀온 사람은, 다시 돌아가도 그 흔적을 남기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포크를 들지도 않았고, 디저트는 식어갔다. 하지만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둘 다 지금 막 아주 중요한 문을 하나 열어젖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식당을 나서니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당신은 내 어깨에 자신의 재킷을 가볍게 덮어주었다. “이거, 아직 차가운 바람 불잖아요.”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옆을 걸었다.
그날 밤 나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보다,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만남은, 그 짧은 머무름 속에서도 평생을 바꾼다. 아주 작은 동행이 거대한 위로가 되고, 사소한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구하기도 한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거창한 언약도, 미래를 약속하는 말도 없이. 그저 그날, 그런 밤, 그런 따뜻한 눈빛에서.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품을 수 있는 가장 작고도 큰 기적이다. 사라지지 않는 온기, 오래도록 가슴 어딘가에서 빛나는, 그런 사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