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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늦기 전에 Feb 02. 2022

지금 당장 마음을 전달해야 하는 이유

아버지께 보낸 마지막 편지.

편지 : 상대편에게 전하고 싶은 안부, 소식, 용무 따위를 적어 보냄.


  난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편하고, 편지로 마음을 전할 때 더욱 진솔한 마음을 담아낼 수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손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가끔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는 한다.


  하지만 아버지께는 단 한 번도 편지를 쓴 적이 없었다. 아니, 거창하게 편지가 아니라도 작은 쪽지 한 번 주고받은 적이 없다. 사이가 나쁜 탓도 있었지만 대화 자체가 별로 없었고, 대화를 하더라도 지극히 형식적인 대화만을 나누고는 했다. 그렇기에 편지를 쓸 이유도, 쓸 내용도 없었다. 그런데 딱 한 번, 편지라고도 할 수 없는 짧은 메시지를 남긴 적이 있다. 작은 통장안에.


  내 아버지는 '0점짜리 아버지'였다고 표현한다. 지금 생각해도, 아니 언제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로서는 자격미달이었다. 술을 좋아했고 책임감도 없었다. 또 폭언으로 가족을 뿔뿔이 떠나가게 만들었다. 그 여파로 난 어린 시절을 거의 방치당한 채로 보내야 했다.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비교적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낙상사고를 당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막노동을 전전하던 중 2층 높이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허리를 크게 다친 아버지는 이후 일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장애등급을 받게 되면서 기초 생활 수급자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왔다. 


  당시 2인 가구 기준, 한 달에 40만 원 조금 넘는 생활비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돈을 금방 써버리고는 했다. 술을 마셨고, 담배를 피웠다. 학교를 다닐 차비가 모자랐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거리의 학교에 등교하고, 하교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고된 생활이었다. 몸은 너무 피곤했지만 차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밥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허리를 다쳐 그만둘 때까지 1년 여간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야 했다. 


  그러던 중 대학 수시모집 기간이 되었다. 집안 형편 때문에 학비가 무료였던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대학만큼은 너무 가고 싶었다. 인문 과목을 좋아했고, 역사 교사가 되기를 꿈꿨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아르바이트를 하든, 장학금을 받든 지 해서 어떻게든 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학 진학의 희망에 부풀어 수시모집 관련 책자를 가지고 집에 왔다. 하지만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집에 원서비 5만 원이 없었던 것이다. 등록금이 문제가 아니라 원서비조차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대학은 사치라는 현실을 새삼 깨달았다. 서글펐다.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눈물을 한바탕 쏟고 나서야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어쩔 수 없이 취업을 하겠다는 내 말에 아버지란 사람은 또 속을 뒤집어 놓았다.


"니 취업 나가면 기초생활비 안 나오는데..."


  울화가 치밀었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철저히 지워버렸다. 먼 객지로 취업을 나가버렸고, 한 달에 한두 번, 할머니를 뵈러 올 때만 집에 들어갔다. 그래도 굶어 죽게 둘 수는 없었기에 딱 기초 생활비로 나오던 액수의 생활비를 드렸다. 


  그렇게 객지 생활을 한지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안 보고 살아서 그런지, 먹고살만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또 가끔씩 들렀을 때 마주하는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가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아버지 생신에 맞춰 용돈과 함께 처음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생신축하해요"


  그런데 며칠 후 아버지는 전화로 돈을 조금만 더 보내줄 수 있냐고 했다. 기가 막혔다. 생활비에 용돈까지 더 드렸는데 또 돈을 달라니... 화가 나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메시지와 함께 돈을 보냈다.


"제발아껴써요"


  그렇게 마지막 편지를 전하고 2주 뒤, 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에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 '돈을 조금 더 달라'는 아버지의 말은 유언이 되었고, "제발아껴써요"라는 메시지는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되어 통장에 남겨졌다. 지금까지도 죄책감에 그 통장만은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 꺼내어 볼 때마다 후회로 가슴이 사무친다.


"왜 하필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했을까..."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할 순 없었을까..."

"기껏 10만 원 보내면서 왜 그렇게 생색을 낸 걸까..."

"그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용돈 좀 더 보내는 건데..."

"살아생전에 편지 한 통 쓸 걸..."

"원망이든 사과든 살아있을 때 해야 했는데......"


  물론 우리의 관계는 내 잘못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버지가 백번 잘못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후회는 남겨진 사람의 몫이었다. 그렇게 남겨진 통장은 '죽음'이라는 도구에 집착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죽음이란 마냥 슬프기만 한 일도, 두렵기만 한 일도 아닌 그저 미래의 어느 시점에 겪게 될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실이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든, 어느 누구보다 원망스러운 사람이든 간에 언젠가는 마지막 순간이 올 것이다. 만약 그 순간이 다가온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어떤 말을 전하지 못하면 후회로 남을 것 같은가? 늦기 전에 꼭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부디 기회가 있을 때 그 말을 다 전할 수 있기를 빈다. 원망이든, 애정표현이든 '지금'이 그 말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후회는 언제나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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