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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늦기 전에 Feb 08. 2022

생명을 두고 도박을 해야할 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

"목숨을 걸 수 없다면 배팅하지마라"


  영화 <타짜>에 등장하는 대사이자,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는 문구이다. 목숨을 건 배팅이라니 참 무서운 말이다. 서양의 '치킨게임'이나 '러시안 룰렛'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가끔 경쟁에 있어 '목숨을 건다'는 말을 사용한다. 물론 실제로 생명이 걸리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현실에서 생명을 두고 도박을 해야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운전 중 갑자기 뛰어나오는 야생동물을 만날 때는 위험을 감수하고 급히 차선을 바꿀 것인지, 생명을 포기하고 큰 사고를 막을지 결정해야 한다. 또 수술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가족의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하는 일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같은 도박은 언제나 힘들다. 내 선택에 따라 다른 생명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처갓집에는 뭉치와 망고라는 두 마리의 반려견을 키우고 있다. 그 중 뭉치는 14년 넘게 아내와 동거동락한 말 그대로 가족이다.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시점도 어느 덧 8년 전 일이니, 나도 뭉치의 견생에 절반 정도는 함께 한 셈이다.


  그런 뭉치가 최근에 아팠다. 아내와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니 침샘낭종이라는 종양이 의심된다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규모가 있는 병원으로 이동해서 검사를 했다.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수술실에서 큰 상자를 안고 나오는 한 가족을 마주했다. 그 가족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아마도 반려견의 수술이 잘못 된 듯 보였다. 불현듯 공포가 밀려왔다. 부디 뭉치는 종양이 아니길 기도했다.


  "뭉치 보호자 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진료실로 향했다. 안타깝게도 검사 결과는 종양이었고, 그 중에서도 악성종양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다른 부위로 전위 됐는지 까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수술을 하지 않으면 몇 개월을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수술을 하지 않으면 2개월 남짓, 수술을 하면 기대 수명이 2년은 되는 것 같았다.


  아내는 당장이라도 수술을 하길 원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오래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듯 보였다. 하지만 다른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강아지 나이로 14세면 이미 노령견으로 마취로 인해 수술이 잘못될 위험성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당장 잘못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수술을 할 것인지, 남은 여생을 운명에 맡길 것인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갑자기 과거의 할머니와 관련된 일이 생각났다. 이런 경험은 과거에도 한 적 있었다. 내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한지 5~6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요양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가슴 통증을 호소하고 있고, 엑스레이 상으로 뭔가 보이는데 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에 이야기 했더니 검사도 하지말고, 이제 그만 보내드리자고 했다. 만약 검사를 해서 암이면 어떻게 할 거냐고, 의사소통도 못하는데 수술이라도 할 거냐고 했다. 사실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암이라고 해도 할머니는 장시간 마취를 견뎌낼 기력도 없었고,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난다고 해도 기대할 수 있는 수명이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난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비록 의사소통도 제대로 안되지만 할머니가 아픈 것을 아는데 치료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설 구급차를 빌려 큰 병원으로 이동해 검사를 진행했다. 다행히 작은 폐결절로 판명되어 수술은 필요치 않았고, 할머니는 4년을 더 사시다가 명을 다하셨다.


  내 아내 역시 같은 결정을 내렸다. 뭉치가 죽는다는데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수술을 진행했다. 수술 후 관리가 중요하다고 해서 밤새 동물병원에 상주하며 뭉치 곁을 지켰다. 결론적으로 수술은 잘 끝났고, 뭉치는 현재 건강한 모습을 회복했다. 


  지금 생각해도 타인(또는 다른 생명)의 생명을 걸고 해야만 하는 도박의 순간은 아찔하기만 하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순간이었다. 혹여나 내가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수술여부를 결정해야하는 기로에 놓인다면 부디 '내 의사로' 수술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에게 그런 끔찍한 선택을 강요하고 싶지않다.


  물론 모르겠다. 막상 그런 순간이 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을 수도 있다. 또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가족들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런 순간이 왔을 때, 1~2년 더 사는데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될만큼 알차게 살았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아내도, 나도 그런 결정의 순간에 드는 감정은 '후회'였다. '조금 더 잘해줄 걸..., 좋은데 데려갈 걸...,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해줄 걸...'과 같은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왜 진작에 깨닫지 못하고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생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가족과 사랑과 후회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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