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존엄한 죽음>이라는 책을 읽었다. 연명 치료나 웰다잉에는 워낙 관심이 많다 보니 벌써 꽤 많은 '죽음'관련 책을 읽었다. 책 속의 많은 이야기들은 또 한 번 큰 깨달음을 주었고, 미리 죽음에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끔 해주었다.
참고로 난 연명치료 일체를 거부할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연명치료에 의지해 유지하는 삶을 '읽기 전용'의 삶이라 표현한다. 보고 들을 수는 있지만, 세상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삶을 지속하는 것이 유의미한 지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직 30대밖에 되지 않았지만 치기 어린 생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10년간 요양병원에서 연명치료의 어두운 단면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하고 한 결정이다. 이후 단 한 번도 생각이 변한 적은 없다. 내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없다고, 그저 잘 보내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날, 이와 관련된 대화를 아내와 나누게 되었다.
주말을 맞이하여 시외로 데이트를 가게 되었다. 계속 집콕만 하다가 오랜만에 나가는 외출에 둘 다 상당히 들떴다. 그냥 차를 타고 멀리 간다는 사실 자체가 설렘을 가져다주었다.
기쁜 마음으로 고속도로에 올랐다. 그런데 굉장히 위험하게 주행하는 차량을 목격했다. 큰 트레일러들 사이를 칼치기로 빠져나갔다. 나도 모르게 "와 저러다 죽겠다"라는 말이 나왔고, 최근에 벌어진 교통사고 뉴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어느덧 대화는 연명치료로 흘러갔다.
[나] 자기, 난 혹시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나이 들어서 살아날 가능성이 없으면 절대 연명 치료하지 말아 줘.
[아내] 또 그 소리야? 도대체 왜?
[나] 나는 할머니 때문에 요양병원에 10년을 왔다 갔다 했잖아. 그때 봤거든, 연명치료라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환자 본인도 엄청 힘들겠지만, 그걸 옆에서 보고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 근데 더 무서운 건 그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 정도 상태의 환자는 이미 의사 전달을 할 수가 없고, 보호자는 차마 자식 된 도리로 그걸 중단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악순환이야. 그러니까 혹시나 내가 그렇게 된다면,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무조건 연명치료 중단하고 잘 보내줘.
[아내] 아이고 진짜. 알았어, 알았어.
[나] 만약에 자기가 그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할까?
[아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살려줘. 1년을 살든, 2년을 살든 최대한 살려줘.
[나]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 생각은 못했네. 그렇게 할게. 자기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살려볼게.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많은 경우 '나처럼 연명치료를 원치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 또한 편협한 사고방식이었다. 누군가는 연명치료를 해서라도, 단지 볼 수만 있는 '읽기 전용'의 세상일지라도 1년, 아니 단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또 그런 사람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처럼 연명치료가 죽기보다 싫은 사람도 막상 생애 마지막 순간이 오면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또 반대로 아내처럼 연명치료를 원하는 사람도 참기 힘든 고통에 직면하면 차라리 존엄한 마무리를 꿈꾸게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당사자'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실 때 마음 아팠던 순간 중 하나가 할머니의 '심폐소생술 포기 각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이었다. 고령의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할 경우, 뼈가 부러져 오히려 더 위험한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서명하는 주체가 '내'가 되었을 땐 이야기가 달랐다. 그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 그토록 힘들지 몰랐다. 그때의 심정은 할머니를 살릴 권리를 내가 뭐라고 포기하는지에 대한 한탄이었고, 나아가서 할머니를 내가 죽이는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들게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애의 마지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한다. 하지만 현대의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 꺼림칙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한 번은 올 것이다. 그때는 이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일 수도 있고, 임종이 얼마 안 남아서 남은 인생과 연명치료의 효율성에 대해 따져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니 미리 이를 결정해두어야 한다.
특히 가족에게만큼은 미리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끝에 남아있는 것은 가족이다. 사람 일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의식이 멀쩡할 때, 건강할 때 선택하고 그것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만 원하는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다. 이는 떠나는 자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이고, 보내는 자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이다. 부담 가질 필요도 없다. 언제든 선택을 바꿀 수도 있고, 새로운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더 늦기 전에 한 번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