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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늦기 전에 Mar 26. 2022

가장 슬픈 것은 그때 그 말을 못 한 것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다가 갑자기

  죽음과 관련된 책은 발견하는 대로 대부분 챙겨보지만, 가끔 특별히 눈길을 사로잡는 책들이 있다. 바로 죽음에 임박해서, 또는 죽음을 준비해 본 이가 저술한 책들이다. 물론 의사나 유품 정리사처럼 죽음의 근처에서 겪은 이야기도 많은 깨달음과 울림을 주지만, 직접 죽음에 맞닿아본 이의 그것과 울림의 크기가 같을 리 없다.


  그런 책들은 운명처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고는 했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기억을 잃어갈 때,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접하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고, 위지안의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를 만나 희미하게나마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스물아홉 생일에 들린 서점에서 만난 하야마 아마리의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를 만나고 더 이상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최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만났다. 대화체로 쓰인 이 책을 읽는 동안 가끔은 스승의 가르침을 듣는 제자가 된 듯했고, 또 가끔은 할아버지께 옛날이야기를 듣는 손자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어쨌든 삶에 대해 많은 고민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무심코 읽은 구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딸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나니 가장 아쉬운 게 뭔 줄 아나? '살아 있을 때 그 말을 해줄걸'이야. 그때 미안하다고 할걸, 그때 고맙다고 할걸...... 지금도 보면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죽음이나 슬픔이 아니라네. 그때 그 말을 못 한 거야.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흘러. 그래서 너희들도 아버지한테 '이 말은 꼭 해야지' 싶은 게 있다면 빨리 해라. 지금 해야지 죽고 나서 그 말이 생각나면, 니들 자꾸 울어."


김지수, 이어령 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마치 내가 죽음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그토록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를 외치는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 죽음 그 자체가 너무 슬픈 일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눈물샘을 눌러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죽음에 대한 감정도, 괴로웠던 장례식에서의 기억도 파편처럼 머릿속에 새겨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으로 남겨졌을 뿐이다.


  그런데 아버지께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면 지금도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이 눈에 고이곤 한다. '먼저 다가가서 말 한마디 걸어보는 거였는데',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 하다 못해 '나한테 왜 그랬냐고 한 번 미친척하고 따져봤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쉬움이 가슴을 짓누른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는 것 같다. 


  살아생전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들이었는데 왜 이리도 가슴을 후벼파는 것인지 모르겠다. 언제든 할 수 있었던 '별 것 아닌 말'들이라 더욱 그런 것 같다. 혹시나 지금 이 글을 보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면 지금 한 번 전해보자. 잠깐 미친놈이 되는 것이 평생 눈물 버튼을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합리적인 선택일 테니까.


그 아무것도 아닌 한 문장이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지금 해야지 죽고 나서 그 말이 생각나면, 니들 자꾸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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