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약도 치료제도 없는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 봐. 그럼 엄청 용감해질 수 있어"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주옥같은 대사다. 살아보니 이 말은 언제나 정답이었다. '높은 곳'이 무서운 것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고, '질병'이 무서운 건 그 질병을 걸렸을 때의 통증이나 후유증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병은 '건강염려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등 가운데 부위에서 쪼그라드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마치 찌르는 것 같기도 했고, 근육에 쥐가 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 같기도 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하게도 근육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심한 '건강염려증'을 앓고 있다. 그래서 곧바로 포털사이트에 검색을 해보았다. 그런데 한 키워드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췌장암"
췌장암의 증상 중에 등 부근의 통증이 있었다. 걱정이 밀려왔다. 등 통증 말고도 여러 증상들이 설명되어 있었고,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지만 이미 췌장암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이런 증상을 검색할 때 항상 급격한 체중감소에서 탈락이다. 몇 년째 한 번도 살이 빠진 적이 없다.)
어느새 등 통증에 대해 검색하려던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췌장암의 원인, 증상 등을 검색하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니까 위험한 것은 아닐까?', '최근에 등이 좀 자주 아팠던 것 같기도 하네...' 등등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불현듯 죽음의 두려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까지 건강을 걱정하게 된 거지?
생각을 해보니 군 복무 시절 선임병사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6개월 선임이던 A상병은 나와 같이 군대에 조금 늦게 온 케이스로 23살 동갑내기였다. 흔히 말하는 '에이스'로 불릴 만큼 군생활을 잘했으며, 후임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동갑이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동생들 밑에서도 열심히 하려는 내 모습을 좋게 봐주었는지 몰라도 우리는 꽤 가깝게 지냈다. 그는 험상궂은 외모와 달리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신앙심이 투철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랬던 그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헛구역질을 했고, 얼굴은 흙빛이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복통을 호소했다. 내 기억에 그는 결코 꾀병을 부릴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몸이 안 좋아 보였다. 결국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대장암'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충격이었다. 이후 A상병은 조기 전역을 해야 했고, 몇 년이 지난 후 군대 동기를 통해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프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십 대에 암이라니... 나도 죽을 수도 있구나... 빨리 검사해봐야겠다...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때부터 내게는 '건강염려증'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 병은 고통도 없고, 후유증도 없다. 하지만 그 '무서움'의 크기만큼은 그 어떤 질병보다도 크다. 이번에 췌장암을 걱정하면서 느낀 감정도 '지금 죽으면 어떡하지?'까지 발전되었다.
물론 그 뒤로 증상은 없다. 다른 이유로 방문한 병원에서 물어보니, 등에 통증이 생길 만큼 말기 췌장암이 진행되려면 이미 황달이나 복통을 수반한 다른 증상들이 보였어야 한다며 단순 근육통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그러고 보니 최근 안 하던 운동을 시작하긴 했다.)
그렇게 죽음에 관한 책을 읽고 죽음을 공부하고, 또 사람들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자'는 목표를 가졌음에도 죽는 것이 너무 두렵다. 늘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살자고 주장하면서도 막상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눈에 눈물부터 차오른다. 부디 이제라도, 내일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일단 오늘부터 최선을 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