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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늦기 전에 Jan 17. 2022

경조사(장례식)에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이유

작은 성의, 큰 위로

  난 웬만한 경조사는 대부분 참석한다. 결혼식이나 돌잔치의 경우는 가끔 시간대가 맞지 않아 축의금으로 성의만 표할 때도 있지만, 장례식만큼은 어떻게든 참석하려 노력한다. 아마 학창 시절의 출석부처럼 경조사를 체크하는 도구가 있다면 '정근상'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주 경조사를 다니다 보면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난다. 누군가는 경조사 참석을 마치 목돈을 만들기 위한 적금과 같이 생각하는 이도 있고, 예의상 왔다가 얼굴도장만 찍고는 사라져 버리는 이도 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오로지 의리로 참석하여 끝까지 의리로 자리를 지키기도 한다.


  나는 위 이유들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미 결혼도 했고, 아프거나 연로한 가족도 없어서 아마 향후 몇 년 간은 경조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혹 자녀가 생기더라도 돌잔치는 하지 않을 예정이라 체면이나 금전적인 목적이라면 굳이 참석할 이유는 없다. 또한 그렇게 스스로 그렇게 의리를 중시하는 성격이라고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꾸준히 경조사에 참석하는 이유는 오직 15여 년 전,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마주했던 친구에게 받은 감동 때문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 편이 뭉클해져 온다.


  15년 전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12월 31일에, 새해를 하루 앞두고 세상을 등졌다. 당시 세상은 온통 연말의 축제 분위기에 취해 있었고, 사람들은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기대로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상주가 되어 장례식장에 남겨졌다.


  겨우 스무 살 나이에 맞이한 부모의 장례는 몸과 마음을 한없이 약하게 만들었다.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였음에도 그 순간만큼은 원망보다는 슬픔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분명 0점짜리 아버지였는데, 원망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 먼저 떠났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를 향했던 원망과 미워하는 감정은 죄책감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가슴을 후벼 팠다.


  그래서였는지 장례식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꽤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와주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직장생활을 한 덕에 직장 상사들의 조문이 줄을 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라 학창 시절 친구들까지도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마 1월 1일이 휴일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덕분에 슬픔에 잠겨있을 새도 없이 조문객을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다들 일찍 군입대를 했기 때문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하던 친구들이었는데 정작 가장 힘든 순간에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에 속이 상했다.


  그렇게 조문객을 맞이하는 데 여념이 없던 때, 익숙한 모습의 친구가 조문을 왔다. 친구 A 였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살고 있는 A는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였고, 술자리마다 의리를 부르짖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의리 있는 녀석이었다. 객지 생활을 하느라 연락이 뜸하긴 했지만 그래도 종종 소식은 듣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군 입대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차였다. 친구 A를 보자마자 왠지 모를 눈물이 쏟아졌다.


 "우째 왔노, 니 군대 있는 거 아니었나"

 "와 이라노, 당연히 와야지. 신병 휴가 나왔다."

 "... 고맙다. 진짜 고맙다."


  그렇게 A는 밤새 빈소를 지켜주었다. 다음날도 조문객을 맞느라 정신이 없던 와중에 이질적인 모습을 목격했다. 온통 검은색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알록달록 초록빛을 내는 군복을 입은 누군가가 입구에 걸터앉아 전투화 끈을 묶고 있었다. 친구 A였다. 그날이 부대로 복귀하는 날이라고 했다. 얼마나 기대했을지 모를 첫 휴가를, 1분 1초가 아까웠을 그 시간을 날 위해 기꺼이 내어주었던 것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슬픔에 잠겨있는 내게 A는 도리어 미안하다고 했다.


"친구야 오늘 부대 복귀라서 끝까지 같이 못 있어줘서 미안타."

"아이다. 이래 와준 게 어디고... 진짜 고맙다 내 진짜 평생 안 잊을게"

  그때 느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조문 한 번 오는 것, 와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것이 상심에 빠진 이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를. 장례를 모두 마친 후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부의록을 살펴보다가 또 한 번 눈물을 삼켰다.


성 X 모 : 0000 원

김 X 현 : 0000 원

  전화로 군대에 있어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어쩔 줄 몰라하던 또 다른 동네 친구들의 이름이 부의록에 적혀있었다. 아마 다른 이에게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함께 해준 진심이 느껴져 너무나 고마웠다. 그 어떤 위로보다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 마음에 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때의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교류가 뜸한 학창 시절 친구부터 전 직장의 직장동료까지 부고 연락을 받으면 웬만하면 참석한다. 워낙 뜬금없이 경조사에만 나타나다 보니 가끔 오해도 받는다.


"니 결혼할 때 됐나?"

"니 무슨 국회의원 선거 나가나?"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평소에는 연락도 안 하다가 경조사에만 나타나니까. 하지만 어떤 오해를 받더라도 좋다. 그저 10여 년 전 내가 받았던 그 감동과 위로를 다시금 전하고 싶을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위로 한 마디가 장례식만큼 특별해지는 때도 없다. 또다시 누군가의 조문을 가게 되더라도 늘 그래 왔듯이 진심을 다해 위로를 전하고 올 것이다. 부디 얼른 코로나가 끝나서 마음 편히 경조사에 참석할 수 있는 날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음성으로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l1rV8rwRK7A&t=13s


"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
- 당나라 시인 이태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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