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은 안 믿지만, 제사는 지내고 싶어

1년에 하루, 마음을 꺼내는 시간

by The 늦기 전에

1월은 늘 활기차다. 사람들은 해돋이를 보러 가고, 새해 계획을 세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 ‘이제 아버지와 할머니 제사가 다 되었구나.’ 남들에게는 시작의 달이지만, 내게는 기일을 떠올리는 달이다. 새해만 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나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 윤회도, 천국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매년 제사를 지낸다. 믿음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의무라고 말하기에도 조금 어색하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는 제사를 참 정성스럽게 지냈다. 아버지와 내가 절을 하고 있으면 할머니는 그 뒤에서 두 손을 모으고 “우리 손주 잘 되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돌아가셨다. 형제도 없기에 이제 제사는 오로지 내 선택이 되었다. 누군가는 요즘은 제사 안 지내도 된다 했고, 누군가는 그래도 부모 제사는 지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어느 쪽에도 기대지 않았다. 그냥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보기로 했다.


처음 제사를 준비할 때는 막막했다. 홍동백서가 맞는지, 과일은 몇 개를 올려야 하는지 등 검색을 반복했다. 그러다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내 아버지와, 요양병원에서 몇 번 뵌 게 전부인 할머니의 제사를 함께 고민하고 준비해주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생각이 잠시 멈췄다. 제사는 내 가족사이고,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아무 조건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어 주었다. 그 순간에는 제사상의 격식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런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고마웠다.


나는 제사를 지내며 바라는 것이 없다. 잘되게 해 달라는 기도도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기대로 제사를 지내려고 한 것도 아니다. 다만 1년에 하루, 그들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를 보며 문득 깨달았다. 제사는 떠난 사람을 생각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더 또렷하게 보이는 날이라는 것을. 내가 아버지, 할머니를 기리는 마음만큼, 아니 그보다 더 지금 옆에 있는 아내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생각하니, 오히려 지금이 더 또렷해졌다.



나는 여전히 귀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제사는 지내고 싶다. 체면이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하겠다는 다짐을 잊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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