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항상 웃고 있는 가면을 쓴 채로 속으로는 울고 있으면서 수면 아래서는 발버둥 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내 우울의 근원은 엄마다. 엄마는 늘 강압적이었다. 가족 구성원이 당신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화를 냈다. 잘못한 일이 없어도 엄마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혼났다. 엄마의 기분은 예측불가능한 것이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혼내는 방식은 일방적으로 폭언을 내뿜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나는 영문도 모를 폭언들에 절여져 자랐다. 자기 검열은 습관이 됐다. 아빠도 엄마의 폭언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아주 오랜 기억의 저 편에서부터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다. 싸운 이유는 아빠가 쥐꼬리만큼 밖에 월급을 못 벌었고, 집에 빨리 들어오지 않아서였다. 누구의 잘잘못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엄마와 아빠는 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집에 들어오기 전에 긴장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혼날까 봐, 또 부모님이 싸워서 나한테 불똥이 튈까 봐, 항상 엄마의 눈치를 보게 됐다.
엄마와 아빠의 사이는 점점 악화됐다. 아빠는 엄마를 피해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 세계도 온전치는 않아서 주식과 코인으로 저당 잡힌 삶을 살게 됐다. 엄마는 이 때다 싶어서 30년 부부생활이 어그러진 모든 탓을 아빠에게로 돌렸다. 둘은 별거한 지 10년이 됐지만, 아직도 이혼하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아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아빠는 아파트 명의가 엄마 앞으로 되어있다는 이유로 이혼을 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아파트는 우리 가족의 전재산이라, 잘못된 투자로 허덕이는 아빠에게는 놓치기 아까운 금덩이처럼 보일 것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주는 생활비에 삶의 주도권을 빼앗겼으며, 그것도 모른 채 아빠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신세한탄만을 나에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상황을 개선하려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3년 전 엄마와 함께 살던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이대로 계속 엄마와 같이 살다 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씩 스스로에 대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사람의 눈치를 본다. 내 기분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기분. 상대의 기분이 좋지 않거나, 관계가 어그러질 때면 내 안에서 그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애쓰고 자책한다.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나도 모르게 사소한 거짓말들을 한다. 상대가 혹시라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싶은 것들은 다 꾸며내고야 마는 것이다. 이게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얄팍한 거짓말을 한 후 나는 곧바로 그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스스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 자책하고 평생 이런 습관적 거짓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며 더 깊은 바닷속으로 침잠한다. 이것은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이미 내 안의 저 깊은 곳에 뿌리 박혀버린 습성이다. 이런 상황의 반복은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내가 스스로를 버려두고 그들의 입맛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금세 눈치채고 떠나거나, 나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연애도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나는 상대에게 쩔쩔맸다.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고 느껴지면 뛸 듯이 기뻐했고, 덜 좋아한다고 느껴지면 한 없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나를 잡고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며,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방증이었다. 최근에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로워서 죽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는 게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위험했다. 나에게 주어진 생명을 놓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의 소용이 미치지 않는 바다 한 복판에서 나는 이제, 힘껏 발버둥 쳐 뭍으로 가야 한다. 그 길이 외롭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사람이 아가미 없이 물속에서 오랜 기간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