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me, salu

by 영일이

1.

삶은 이상하게도, 큰 사건보다 작은 틈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울컥하는 힘이 잔뜩 들어간 주먹, 애뜻해서 머뭇거리고 마는 침묵, 돌아갈 수 없다는 직감

끝이 나야 다음이 열린다는 사실도
대부분 그런 사소한 순간에 뒤늦게 배운다.
막이 내려가야 다음 장면이 가능해지고,
떠남이 있어야 도착이라는 말도 자리를 찾는다.


2.
하지만 우리의 대부분은
떠나지도, 도착하지도 않은 채
하루라는 방에 오래 머문다.


머무름은 분명 편안한 일인데,
너무 오래 머물다 보면
풍경이 통째로 배경으로 밀려난다.

배경이 된 삶은 대개 조용하게 희미해진다.
살아 있다는 감각도 함께 옅어진다.


3.
그렇다고 반짝이는 순간만 쫓으며 살 수는 없다.
무대의 막이 내린 뒤에도
어둑한 조명 아래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고,
집에 돌아오면 씻고, 먹고, 눕는 일이 반복된다.

지루함은 생각보다 자주
삶의 바닥을 떠받치는 구조물 쪽에 가깝다.


4.
문제는, 자아가 커질수록
‘살아 있다’는 느낌을 끌어내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조건을 요구하게 된다는 점이다.

더 빨리, 더 크게, 더 특별하게.
더 강렬한 감정, 더 화려한 성취, 더 드라마틱한 전환.

그런 것들을 향해 계속 손을 뻗다 보면
삶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멀어진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느끼는 대신
어제보다 더 자극적인 무언가만을 찾게 되고,
결국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만 남는다.


5.
그래서 나는 작은 자아를 생각한다.

여기서 작은 자아는
“나 따위…” 하고 몸을 줄이는 자학이 아니라,
감각의 초점을 낮추는 방식에 가깝다.

초점을 조금만 낮추면
창틀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오늘의 표정을 갖게 되고,
어제와 똑같아 보이던 벤치도
앉는 사람과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다른 풍경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작은 자아는 이 변화를 “살 만한 일”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는 크기다.


6.
돌아보면 나를 진짜로 움직였던 순간들은
대단한 성공의 장면이 아니었다.

첫 취재를 나갔던 날,
첫사랑 앞에서 말이 꼬이던 시간,
아무 준비 없이 아이들을 마주해야 했던 오후들.

초라했고, 가난했고

너무나 작아서 그 어느때보다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7.
새해를 앞두고 나는 다시 작은 자아로 돌아가려 한다.

우리는 정답이 없어도 살아지는 존재이기에
어떤 질문들은 풀리지 않은 채로

그저 품고 살아갈 따름이다.

해서 건배! 다.
언젠가 이미 정답으로 살고 있을 나를 위해. 그런 나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을 나의 자아를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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