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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동원 Oct 17. 2021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여섯 번째 다시씀,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잘 머물다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서둘러 마음을 옮긴 건 아닌데 당신과의 시간에는 늘 가속이 붙어 나도 모르는 사이 종착지에 다다랐나 봅니다. 우리 이제 서로의 안녕을 마주합시다. 


  내 마음은 처음부터 당신의 언어로 쓰여 있었던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어있던 마음이 당신이라는 사람 하나만으로 이렇게 생생히 살아난다니요. 당신이 읽고 간 내 마음속 활자들이 하나하나 새로 태어나 지금의 나를 쓰이게 한 것만 같은데 당신께 제대로 된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지금에서야 편지로 이 말을 전합니다. 


  우리 나중에 함께 살면 꼭 마당 딸린 집에 큰 호두나무를 심어두자던 약속을 기억해요. 당신과 나, 그리고 언젠가 만나게 될 우리 아이가 같이 커가는 커다란 나무를 보면서 우리는 흐르는 세월마저 낭만이라고 여기며 성실히 살아갈 수 있었겠지요. 이 생각을 하는 건 나에게 정말 행복한 상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골목골목 담장을 넘어와있는 호두나무를 허투루 보지 못했고, 횡단보도를 기다리며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쉽게 지나치지도 못했습니다. 그곳에 서있는 엄마가 당신이 되기를, 그리고 아빠는 꼭 나이기를, 수도 없이 바랐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날들마저 우리 연애의 여운으로 남았는데 언젠가는 흐려 없어질 기억이 되어가는 게 싫어서 나는 굳이 추억이라는 갈피를 꽂아 놓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살면서 서로를 견뎌 잊겠지만 나는 갈피가 꽂힌 그 책장을 남몰래 펼쳐볼 것만 같아 차마 없던 일로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어제 정류장에서 당신을 보내고 나는 한참 동안 마산시내를 정처 없이 걸었습니다. 당신과 선을 봤던 그 찻집을 지나는데 왜 그리도 마음이 일렁이던지 멍하니 깜빡이는 간판만 쳐다봤습니다. 한 손에는 당신이 쥐어준 크림빵이 잔뜩 든 봉지가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아직 채 마르지 못한 닦아준 당신의 눈물이 있었는데 그 행색이 너무도 초라해서 나도 조금 눈물을 지어냈습니다. 그렇게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소나기가 내려 근처 전화부스에 급히 들어가 비를 피했는데요, 수화기를 한참 들었지만 차마 당신의 번호를 누르지는 못했습니다. 비를 피한다는 핑계를 만들어 공중전화부스를 찾아 들어간 내가 우스워 이 이야기를 해주면 환하게 웃음 지어줄 당신을 생각했는데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괜히 당신을 찾았습니다. 사실 내 몸과 마음 어디 하나 당신이 없는 곳이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던 게 전부입니다.


 구미에서 마산까지 버스를 타고 매일같이 당신을 보러 오는 시간도 그저 좋았습니다. 당신은 늘 미안해했지만 웬걸요, 당신 덕에 나는 혼자 도로 위에 머무는 그 시간마저도 설렘이었어요. 정류장에 내려 북적이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이 흔드는 손을 한 번에 찾을 수 있었던 것도 도로를 달려오는 시간 내내 빠짐없이 당신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이런 설렘을 늘 의심했던 나였지만 그 대상이 당신이라면 나는 기꺼이 또 한 번 속아도 좋다고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결국 달콤함에 함빡 속았지만 당신으로 인해 후회 없었던 시간들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내일부터 당신이 없는 나의 생경한 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고민해 보아야겠습니다. 꽤 오래 걸릴 것만 같습니다. 당신도 가끔 우리 추억이 피어날 자리에 아무것도 솟아나지 않는 공허들을 보면서 나를, 그리고 나와 함께 했던 계절들을 떠올려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우리 마음에 빈자리 없이 새로운 계절이 피고 질 때 비로소 서로를 잊었구나 생각하며 마음에서 영영 놓아주도록 합시다. 사랑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활짝 피었던 마음이 곱게 지는 밤입니다. 꾹꾹 눌러쓰는 이 편지로 미루지 않고 성실히 당신과 안녕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언젠가 올지도 몰랐던 날이 너무도 빨리 온 것만 같지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도 남과 하는 안녕처럼 너무 서둘러 뒤돌지는 말아주세요. 우리 그냥, 서로 마주하던 그때처럼 그 간격과 그 시선 그대로 한 발자욱씩 뒷걸음질 치며 서로에게 인사합시다. 


  두서없이 길었습니다. 안녕, 잘 지내요.



- 1991년, 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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