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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동원 Oct 11. 2021

무릎

다섯 번째 다시씀, 아이유 '무릎'


  선잠이 일상이 된 긴 여름을 보냈다. 깜빡 잠이 들어도 늘 새벽의 어느 점에서 깨어 찡그린 눈으로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잠에 드는 그런 날들만 계속되더니 어느새 나는 단잠의 기분마저 잊어버린 사람이 되어버렸다. 딱 내 한 몸 뉘일 만큼의 작은 침대에서 나는 종종 몸을 웅크리고 이불에 둘러싸인다. 종종 인생에 대한 반발심으로 오래된 반골기질이 튀어나와 '자고 싶어서 잠들던 게 언제였지' 하는 의미 없는 생각들을 하게 되면 어김없이 내일을 맞는 게 권태로워지는데, 이내 '아.. 지금 자면 몇 시간 잘 수 있지'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이 상념의 입을 막아댄다. 오늘도 어김없이 얕은 잠에 빠질 것 같다.


  그날,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나는 잠에 들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꿈, 그저 어린 시절 한 장면을 눈앞에 전시해둔 그저 그런 회상의 꿈. 앳된 얼굴을 보니 꿈속의 어린 나는 일곱 살쯤, 가벼운 옷차림을 보니 한여름의 어느 오후 매미소리를 자장가 삼아 달콤한 낮잠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아직 백발이 드문, 주름이 덜 진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잠들어있는 꼬마인 나, 여름 공기 천천히 고개 들어 인사하는 집의 마루, 파도처럼 하얗게 내 살결에 부서지던 할머니의 부채 바람. 아무런 대화도, 활자도 없는 순백의 도화지 같은 여름날의 초상은 참 역설적이게도 손톱 하나만큼의 여백도 없다. 잠에서 깬 새로운 시간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대하며 할머니 무릎에 곤히 잠들던 그때의 나는 지금은 어디쯤을 걷고 있나. 내일의 색깔을 준비하며 흑백만 그리는 연필 대신 물감을 꺼내 쥐어짜던 그때의 나는 어디쯤 잠들어 있는 건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서글픈 마음에 몸을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AM 3:24


  늘 그렇듯 잠에서 깬 시간은 새벽의 한 복판이었다. 아직 몇 시간 더 잘 순 있겠구나 하며 졸린 눈을 자꾸만 감았는데 평소와 달리 금방 잠에 들지 못하고 나는 애꿎은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애써 눈을 감는 것을 포기하고 텅 빈 천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꿈의 여운이 길었던 탓인지 나는 자꾸만 과거의 나를 마주하려 했다. 딱히 도망가고 싶다거나 지금의 인생이 버거워 매일 밤 눈물로 견뎌 우는 것도 아닐진대, 그 새벽의 나는 하루살이처럼 자꾸만 과거를 그리워했다. 꿈속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는데 정작 내가 그렸던 청춘의 작품이 이게 맞는지에 대해 어린 내게 되물어본 적이 없었다. 잠도 하나 제대로 자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고 멋쩍게 웃으며 너에게 말해야 하는데 미안하게도 그럴 자신이 아직 없다. 그때의 나처럼 말갛게 웃어 보일 수도, 어쩌면 먼 미래의 나처럼 인자한 웃음을 꺼낼 수도 없는 애매한 사람이 되어 인생의 어딘가를 표류하고 있는 것만 같다.


  공허함으로 충실한 새벽은 하염없이 흐르고, 나는 아직도 잠에 들지 못했다. 나의 어린 시절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 해도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데 왠지 모르게 그 길을 찾고만 싶은 새벽이 있다. 젊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눕고 싶었다. 아주 깊은 잠에 빠져도 좋고, 까무룩 잠에 들어도 아무 걱정 없이 숨결을 내쉴 수 있는 그런 잠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든다. 가끔 단잠에 빠진 내 머리칼을 슬쩍 넘겨주는 주름진 손길을 느끼면 나는 잠결에도 행복한 미소를 띠고 밤새도록 달콤한 꿈속을 유영할 텐데 그럴 수 없는 서툴고 구차한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참 아린 시간을 보낸다. 가끔 이렇게 마음속으로 한껏 어리광을 부리는 날은 그래도 제법 마음이 가벼워지곤 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과거를 맴돌다 돌아온 곳에는 내일을 맞이해야 하는 평범한 20대의 내가 있다. 이 사실이 고깝고 미워도 언젠가 이 새벽을 그리워하는 어른이 된 나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자면 몇 시간 잘 수 있지? 내일 제일 급한 업무가 뭐였지?'

  그렇게 무거운 눈을 다시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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