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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동원 Oct 19. 2021

Everything

일곱 번째 다시씀, 검정치마 ‘Everything’



  그날, 안목에는 비가 내렸다. 살풋 잠이든 연인의 단잠을 깨우지 않으려 그는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고 숙소의 싸구려 커피머신에서 내린 커피는 제법 향이 그럴싸했다. 가을비는 어젯밤부터 오래도록 내리고 있었고 그는 커피를 들고 새벽 내내 비가 흠뻑 스민 테라스로 향했다.


  어젯밤 숙소 앞, 그러니까 안목해변 근처의 작은 횟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잔을 부딪히던 두 사람은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오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동안 지내왔던 그들의 이야기부터 새로 다니게 된 회사에 적응하고 있다는 이야기들, 늘 만나면 하는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그날따라 꽤 특별하게 느껴졌다. 비에 젖는 줄도 모르는 밤의 바다는 무성의 흑백영화 같아서 그게 배경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종종 고전의 명작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여자는 이야기했다. 남자는 그 말을 생각해낸 여자가 꽤 멋있다고 생각했다. 무채색으로도 충분한 꽃을 피웠던 그날의 색깔이 온전히 그들의 것인 시간, 두 사람은 이러한 그들만의 사소함을 언제나 사랑했었다. 비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내리는 비를 딱히 부정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마음이 여유로운 그런 밤이 있는데 이들에게는 어젯밤이 유독 그랬다. 우리 우산 없는데 어떡하지 하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그냥 맞으면서 걸어가자고 했다. 두 사람은 비를 맞고 가자는 말을 애써 거부하지 않았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아니어서 괜찮다는 핑계를 댔지만 둘은 그저 함께 흠뻑 적셔질 어떤 것이 필요했다. 소나기처럼 단박에 적셔지고 싶지 않아 이슬비가 곱게 내리는 그 밤, 둘은 식당을 나와 정말 천천히 밤바다의 해변을 산책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한참 동안 어디든 상관없다는 듯이 발이 닿는 곳으로 걸었다. 가난한 여유로움이 전부였던 서울에서도 그들을 종종 이런 산책을 즐겼는데 안목은 오죽했을까, 이 밤을 보내기 싫어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둘은 하염없는 침묵만을 지키며 해변을 걸어갔다. 비에 젖은 모래사장이 두 사람의 발자국을 더욱 짙게 찍어냈다. 구태여 힘을 주어 서로의 자국을 남겨온 것도 아닌데 자신들도 모르는 새 각자의 발걸음을 따라 서로는 걸었고 그 흔적이 남겨져 있는 게 괜히 멋쩍어 발자국을 볼 때마다 두 사람은 어색한 웃음만 꺼내 웃었다. 그렇게 짙게 찍어댄 발자국의 시작이 시선으로부터 저만치 멀어졌을 때 남자는 우리 참 멀리도 왔었네 하며 자신의 연인과 눈을 마주쳤고 여자는 그러네 이제 잘 보이지도 않는다 하며 작은 눈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렇게 또 부질없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이슬비에도 흠뻑 젖은 그들의 새벽은 주변 상가의 불이 다 꺼지고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재밌었다며 유난스러운 말들을 건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밤바다의 소금기를 벗어던지고 한껏 개운해진 몸으로 둘은 침대에 함께 던져 누웠다.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서로를 칭찬했다. 창문 너머로 옅게 보이는 해무와 파도와 함께 사라지는 빗소리가 좋아 여자는 창문 열어 소리들을 음미했고 남자는 그런 그녀를 잘 안다는 듯이 가져온 스피커로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틀었다. 둘은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그저 소리만을 들었다. 꿈만 같던 그 시간이 끝나는 게 아쉬워 자꾸만 뒤돌아봤지만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둘은 긴 침묵을 애써 깨려 하지도 않았고 하릴없는 무성영화에는 그렇게 바다에 안겨 우는 이슬비만이 종일 내렸다.


  누가 먼저 잠든지도 모르는 새벽이 흐르고 여전히 비는 오고 남자는 혼자 테라스에 서 있다. 난간에 살짝 기대어 어제 그들이 걸었던 모래사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짙었던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멍하니 바다만 한참 바라보다 남자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을 때 여자가 남자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잘잤냐고 물으려다가 이내 숨을 고르고 뒤에서 안은 여자의 손을 지그시 잡아주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여자는 남자의 등에 얼굴을 묻고 안목의 아침 바람을 온전히 맞고, 미처 붙이지 못한 담배를 입에 물고 남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연인의 온도만을 느낀다.


  "담배는 끊었으면 좋겠어"


  여전히 비는 오고, 바다와 파도는 화음을 만드는데

  머릿속에서는 어제 들었던 노래만이 한참 맴돌다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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