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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동원 Oct 10. 2021

추적이는 여름 비가 되어

네 번째 다시씀, 장범준 '추적이는 여름 비가 되어'



  “강아지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대."


  학교 벤치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나 주고받으며 맥주캔만 늘려가던 어느 여름밤, 윤은 꽤나 진지한 얘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 시간 남짓 해왔던 과에서 만난 옛 연인 이야기라던지 어느 교수님이든 연구실로 부르면 악을 쓰고 피하라는 이야기 따위의 무게와는 급격히 달라서 나는 괜히 더 이 문장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작 맥주 두 캔을 마시고 취한 건가 싶어 진지한 얘기 할 거면 나 말고 교수님이나 모셔오라고 잔뜩 핀잔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찰나에 윤은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거야. 죽을 때가 되어 숨이 가빠도 주인이 옆에서 괜찮다, 괜찮다 해주면 정말 괜찮은 줄 아는 거지.”


  윤이 이 이야기의 물꼬를 튼 이유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 우리 집에는 꼬리라는 아주 오래된 솜뭉치가 산다. 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처음 꼬리를 데려오던 날 불러주는 모든 이름에 시큰둥하던 녀석은 유독 '꼬리'라는 말에만 반응했다. 메리니, 해피니 하는 촌스러운 이름들을 불러줄 때는 듣는 체도 하지 않다가 '그럼 너 이름 꼬리 할래?'라는 내 말에 그 까맣고 땡그란 눈을 나와 마주치며 더욱더 세차게 짧고 하얀 꼬리를 흔들었었다. 그 이후로 꼬리는 우리 집의 공식적인 막내아들이 되었고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부터 취업을 앞둔 지금까지 우리는 17년 동안 각자의 시간을 공유해왔다. 꼬리이- 하고 이름 끝을 길게 늘여부르면 내가 심심해서 자기를 부르는 걸 안다는 듯 늘 짧은 네 다리로 나에게 달려와 안기는 게 좋아서 나는 언젠가부터 모음을 길게 늘이는 사람이 되어갔다. 꼬리가 내 시간이자 공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깨어나야 하는 평일의 아침잠처럼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고 나와 꼬리가 공유할 수 있는 시간에 끝이 보이는 것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나는 알면서도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하곤 했다. 꼬리의 눈이 제 털과 비슷한 색으로 변해가는 것도, 점점 그 좋아하던 산책을 길게 하지 못하는 꼬리의 다리를 보는 것도 나는 힘에 겨워 어느 순간부터 앞으로 가는 우리의 시간을 성실히 걸으면서도 억지로 고개를 돌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요즘 누워만 있는다며 꼬리. 장마 오기 전에 업고라도 나가서 좋은 거 보여주고 좋은 말 해줘라"

  "미친놈.. 취했네"


  윤은 간만에 진지한 얘기를 꺼냈는데 내가 동조해주지 않는 것에 빈정이 상했는지 담배나 피고 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여름의 복판,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내일부터는 장마가 온다 했다. 꼬리와 함께 맞는 17번째 장마였다.

   



  "꼬리이"


  불 꺼진 거실, 소파 왼쪽 아래에 있는 너무 오래 누워있어 때가 탄 꼬리의 낡은 침대. 꼬리는 늘 그렇듯 내 목소리에 새하얀 고개를 들어 나를 봤고 몇 년 전보단 느려진 발걸음으로 나에게 걸어왔지만 세차게 흔드는 꼬리만큼은 17년 전 만났던 그 날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그게 위안이 되면서도 이른 새벽 어슴푸레하게 낀 숙취 때문인지, 윤이 꺼낸 쓸데없는 문장들 때문인지 나는 괜히 마음이 울적해져 꼬리를 들어 안고 소파에 함께 누웠다. 쫑긋하게 선 귀, 늘 촉촉하게 젖어있던 까만 코, 까만 눈동자, 새하얗고 윤기 났던 털, 17년 동안 꺼지지 않고 도는 바람개비 같은 꼬리. 아직 꼬리는 내 옆에 있는데 자꾸만 이 작은 생명이 없어진 내 하루들을 상상하게 되는 날이 잦아졌다. 윤의 말에 맞장구치지 않은 것 역시 내가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게 싫어서였다. 꼬리는 내 배 위에서 한결같은 꼬리를 흔들며 나와 오래 눈을 마주쳤다. 요즘은 여름 햇볕에 산책 나갈 기운도 없으면서 날 볼 때마다 흔드는 꼬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사랑스러우면서도 너무했다.


  "야, 나는 꼬리가 없어서 내가 기분 좋다는 말을 너한테 전달해줄 수가 없어."


  꼬리는 고개를 돌려서 자기를 만지고 있는 내 손을 연신 핥아댔다. 다 안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지 않아도, 맛있는 간식을 보고 침을 흘리지 않아도 내 마음을 정말 안다는 듯이 따뜻하게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다 문득 강아지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는 윤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작은 아이가 명이 꺼지는 순간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낸다는 게 나에겐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꼬리는 나밖에 모르는 아이, 또 내 슬픔을 너무 잘 알아채는 아이인 까닭이다. 지금 이 불 꺼진 거실, 작은 소파 위에 꼬리는 무엇하나 재지 않고 행복해 있는데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우울해하는 나를 보면 꼬리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아픈 죽음도 뒤로하고 나를 위로해주려 몸을 흔들어 댈 것이 분명하다. 그 모습이 나는 너무 서글플것 같았다. 그러니까 적어도 꼬리와 내가 이 세상에 함께 있는 남은 날에는 날 위해 흔들어 움직이는 꼬리 대신, 정말 행복에 겨워 움직이는 꼬리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찔렀다. 우리가 원하면 그게 어떤 모습이든, 어떤 계절이든 우리는 함께일테니까 지금은 그냥 이 길을 한없이 웃으며 걷기로, 그냥 느리게, 느리게.. 우리의 시간을 걸어가기로 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서 꼬리를 말없이 꼭 안았다.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우리는 그렇게 또다시 서로의 시간을 쌓았고, 서로의 공간에 스몄다.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

  그리 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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