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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동원 Oct 04. 2021

윤무

세 번째 다시씀, 안예은 '윤무'



  사람이 죽어 혼만 남으면 동물이나 곤충 되어, 그리운 이 언저리를 줄곧 맴돈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


  "느 할아버지가 춤을 참 잘 췄다. 니도 알제?"


  마루에서 멍하니 현관 밖을 내다보던 할머니께 봄바람이 꽤 차다며 담요를 건넬 때 할머니는 잠깐 앉아보라는 듯 멋쩍게 말을 꺼내오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줄곧 할머니의 자리는 따뜻한 방 대신 찬 마룻바닥이었다. 몇십의 세월을 함께 했던 아랫목에 이제 한 사람만큼의 밀도가 소멸했으니 그 공허함을 견뎌낼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은 새벽녘 달무리 같아서 강렬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내리 은은한 그 미지근한 온도의 애정도 그들에게는 분명 사랑이었다. 적당한 온도의 사랑으로 살았던 60년, 여느 노부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이별은 필연이었고 언젠가 그들이 만들었던 달무리가 비 되어 내릴 때 온전히 혼자 비를 맞을 사람이 필요하단 걸 작년 겨울부터 우리 가족은 알고 있었다. 이건 어느 한 사람이 반드시 감당해야 할 일이었고 얼마 뒤 그 역할은 결국 할머니의 몫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춤. 눈에 아로새겼던 윤무. 내 기억 속에 있는 할아버지는 역시 그랬다. 수확이 끝난 늙은 논밭에서 직접 팔순잔치를 열어 휘영한 달빛 아래 하나.. 둘.. 셋.. , 하나.. 둘.. 셋.. , 춤을 추던 노신사. 막걸리 취기에 한껏 달아오른 그의 뺨이 도드라지고 이름 모를 민요가 오래도록 흘러나오던 밤, 왈츠며 탱고며 어려운 외국 단어들은 다 멀리 두고서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몸짓하던 그가 참 아련했다. 팔십 노인의 얼굴에 뜬 아이 같은 웃음이 그에게 반했던 60여 년 전 그날을 도로 가져다줬는지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춤사위를 올렸고 나는 어렸던 마음에도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그들의 몸짓을 한 박자씩 눈에 담았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내가 살아온 인생 중 가장 평화롭던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벌써 20년 가까이 지나 희끗해진 이 기억은 마치 나에겐 가을 서리 같아 마음에 예쁘게 내렸다 이내 다녀갔다는 물기만 남기고 사라지곤 하는데 내게 서리 같던 그 기억이 할머니에게는 긴 장마 끝에 생긴 물얼룩이었을까, 그녀는 여전히 이리저리 너울대는 그리움을 타고 기억의 춤을 췄다. 할머니는 나보다 그리움의 역치가 낮은 사람이었고 불현듯 찾아오는 그리움을 애써 부정하지도 않아 종종 얼굴에 그려진 나이테 위로 농도 짙은 눈물을 흘려보내는 게 일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할배 보고 싶나?"

  

  할머니는 오래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이 주책이 되는 나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부부는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흐르는 눈물로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했다. 고생 많았소, 잘 가시오로 끝내기엔 후회가 많았던 이별이라고 지금에서야 할머니는 느끼는 듯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그저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일 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내리는 달빛 아래로 할아버지의 윤무를 다시 그려보려던 찰나에 문 밖으로 노랑나비 한 마리가 할아버지의 춤을 상상하던 그 자리에 달빛을 벗 삼아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동물이나 곤충이 되어서 그리운 이 주변을 맴돈다는 이야기는 사실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해주셨던 말이었다. 죽음에 대해서, 영원한 이별에 대해서 너무 서러워하지 말고 이따금씩 기억이나 한 번 해주면 종종 나비 되어 인사하러 오겠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왜인지 모를 위로를 받으며 할머니의 품에서 잠들곤 했다. 나에게 그 말을 해줬던 할머니는 지금 달무리 아래서 춤추고 있는 노랑나비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쉽사리 말을 건네기보다 그저 그 순간을 음미하고 싶었다. 말의 무게가 무거워 다시 할머니의 눈물에 중력을 더해줄 것만 같아서.


  봄 밤, 날이 좋다는 핑계를 대며 나는 앉아있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무작정 마당으로 나갔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애틋한 윤무를 올렸던 20여 년 전의 그날처럼 나는 할머니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스텝을 밟았다. 우리가 서툰 춤을 추는 동안 나비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할머니의 시선이 종종 나비에게로 향하는 것을 알았고 그럴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봄 꽃 같은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이 참 곱다 생각했다. 나비가 만약 진짜 할아버지가 다시 온 것이라면 그는 분명 둥근 보름달 아래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춤을 췄던 그때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오래전 발맞추던 남편 대신 손자의 손을 잡고 세 박자 춤을 추는 여인의 곁을 떠나지 않는 노랑나비는 한참 동안 옆에서 날개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의 민요 대신 봄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만 가득한 어느 밤, 새벽의 소매를 잡고 춤을 추던 나비는 그렇게 오래도록 함께 있다가 언제 간지도 모르게 밤하늘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홀로 춤추고 있던 나비, 여기에 나 있다고 말하지 못해 그저 눈앞을 맴도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던 나비가 정말 할아버지라면 조금은 서글퍼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귀한 우연이었다.

  

  누군가 미신이라 하는 모든 일은 사실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에서 잉태된 것.

  그래서,

  '사람이 죽어 혼만 남으면 동물이나 곤충 되어, 그리운 이 언저리를 줄곧 맴돈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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