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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동원 Sep 17. 2021

기억을 걷는 시간

첫 번째 다시씀, 넬 '기억을 걷는 시간'



  ‘아직도’라는 말이 마음에서 부유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내 마음이 참 하릴없어서 구름 같은 그 어절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9월 저녁의 하늘은 자라는 아이처럼 매일이 다르다. 어느 하루는 짙은 어둠을 냉큼 받아들이기도 하고 다른 하루는 가는 여름을 붙잡아 뿜어내는 푸름을 쉬이 보내지 않기도, 또 하루는 세상 모든 꽃을 그날 저녁 하늘에 피우려는 듯 흐드러진 빛깔을 짓기도 한다. 나는 이따금씩 하늘에 핀 꽃들이 제법 마음에 드는 날이면 그 색깔이 모두 질 때까지 함께 있기로 다짐하곤 했다.


   “오늘은 걸어서 퇴근할까 봐요. 하늘이 예뻐서.”


  항상 같은 방향의 전철을 타고 가는 직장동료에게 미리 선전포고를 했다. 분명 날 좋은 금요일이라며 회사 앞 냉삼집으로 날 잡아다 끌어 자신의 떨어진 주식 얘기나 줄곧 하다 헤어질 것임이 분명하다는 걸 여러 번 겪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표정을 절대 감추지 않는 그이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미안하니 다음에 내가 사겠다는 너스레를 멋쩍게 떨며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저녁 6시 56분. 지금부터 시가지를 빠져나와 대교로 걸어가면 어림잡아 7시 반쯤 집에 도착하겠다 싶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설렌 발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와 윤슬마저 붉게 물든 한강대교를 건널 때였다. 날이 좋아서인지 다들 가는 걸음을 멈추고 하나둘 핸드폰을 꺼내 오늘의 하늘을 담아내고 있었고 참 새삼스럽다 생각하면서도 나도 함께 카메라를 들었다. 몇 번 셔터를 눌러대다 괜히 머쓱해져서 주위를 둘러보곤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이건 나에게 습관 같은 일인데 매번 하늘이 예쁜 날이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 보내는 게 참 좋았다. 달이 참 예쁘다고 사랑을 고백했던 시인처럼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의 모양은 꽃 핀 하늘을 찍어 건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좋은 하늘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내고 셔터를 누른다.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한 시간 남짓한 순간 동안 나는 꽤 오래 기억을 걸었다. 내 속에 떠다니는 '아직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뒤부터 나는 자주 이렇게 기억 속을 헤매곤 한다. 썩 나쁜 일만은 아니다. 헤맬 만큼의 기억의 면적이 있다는 게 내심 위로가 되기도 했고 내가 꽤 넓은 사랑을 누군가와 나눴었구나 하는 생각들이 종종 피어나는 불안의 안개를 걷어내기도 했다.


  정말 단순히 하늘이 예뻐서 걷고 싶었다. 적당한 걸음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저녁 공기를 온전히 맞으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냈다고 맥주 한 캔 자축하는 하루를 매듭 하고 싶었던 건데 왠지 모르게 나는 또 느리게 걸었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그 세 글자가 기어코 길게 줄을 빼고 반려견의 뒤를 바라보며 종종걸음 내딛는 주인처럼 내가 거니는 걸음마다 의지를 다지며 따라오는 것 같았다. 결국 어김없이 나는 패배했다.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 이의 모습 속에도, 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 뺨을 스치는 저녁의 그 공기 속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그 사람이 있는 그런 날이 됐지만 이 속절없는 마음을 이제는 부정하기 않기로 생각했기에 나는 그저 느리게 걷는 수밖에 없었다.


  애써 걷어내려 하는 기억은 심보가 못 돼서 내가 손을 담가댈수록 재빠르게 도망치고 결국 금방 탁해진 마음에 빠져 허우적대는 건 나라는 걸 지독하게 배웠던 계절이 있다. 이제 시간은 지나고 그 계절도 언제 그랬냐는 듯 내 과거에 머물러 있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을 걷는 하루들이 많은 요즘을 보내고 있었다. 일곱 시 반에 도착하려고 했던 계획은 기억이 함께 걷자고 말한 순간부터 이미 헝클어졌고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시간은 이미 여덟 시를 훌쩍 넘겨있는, 꽃이 진 하늘이 들어서 있을 즈음이었다.


  "이런 날은 별도 많던데 오늘은 하나도 없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 궁상맞은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밤하늘엔 은하수 같은 별들도 촘촘하던데 나는 영화 주인공이 될 팔자는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으로 혼잣말을 웅얼댔다. 그리움이나 미련의 감정은 아닌데 괜히 우리가 있던 곳에 갈 때면 주위를 자꾸만 둘러보게 된다. 나는 지금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즐거운, 딱 적당한 수준의 하루를 잘 살고 있다. 그래도 가끔 이런 날이면 적당했던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줬던 당신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비록 영화 같은 기적이 없고 우리도 영화 주인공들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 추억은 빚어가는 보통의 날들을 나는 여전히 음미하며 살고 있다. 구태여 당신에 대한 그리움과 공허를 꺼내 먹을 필요는 없지만서도 어찌할 도리 없이 아지랑이 피듯 떠오르는 감정은 오늘 저녁 맥주 한 캔과 함께 곱씹어 삼킨다. 걷어내도 걷어내도 부유하는 기억과 걸어도 걸어도 멀어지지 않는 시간들에 대해 잔을 부딪혔다.


소리는 나지 않는다.

또 그렇게 조용히 당신에게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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