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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동원 Sep 25. 2021

산하엽

두 번째 다시씀, 종현 '산하엽'



  너에게,


  나는 종종 눈물로 흠뻑 적시는 새벽이면 너에게 전화를 하곤 했어. 그래서 요즘도 내 새벽에 물비린내가 가득해지면 나는 너를 떠올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어. 네가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네가 걱정했던 것만큼 내 생활이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내가 가진 마음의 병들이 나를 옥죄어 올 때마다 나는 의사 대신에 너를 찾았고 그때마다 너는 아무 말 없이 나의 울들을 수용해주었어.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내가 긴 한숨을 내뱉고 다음 울음을 꺼내기 전에 너는 서둘러 위로를 건넸지. 왠지 모르게 네가 하는 말들은 껍데기가 투명해서 가득 들어찬 알맹이만 보이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나는 이따금 우울이 나를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필사적으로 너에게로 도망쳐 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색이 없는 감정들이 감기처럼 너에게 전염될까 망설일 때에도 너는 깊게 가라앉는 나의 손을 필사적으로 잡아주었어. 나는 그런 네가 참 귀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의 새벽은 젖은 물안개가 가득했어. 나는 또 널 찾았고, 가득 울음을 꺼냈었지. 너는 그런 나를 보고 산하엽같다 했어. 일본에 정말 신기한 꽃이 있다며, 비가 와서 꽃잎이 물에 적셔지면 설국처럼 새하얗던 꽃잎이 투명해져 거짓하나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꽃. 내가 울음으로 함빡 젖을때마다 꽃처럼 투명해지는 게 너는 고맙다고 했어.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 줘서, 투명해지지만 그게 날 사라지게 하진 않는다는 너의 말이 나는 왜 그렇게 위안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눈물에 질식해 죽을 것만 같던 내 호흡이 안정됨을 너도 느꼈던지 짐짓 웃음을 지으며 얼마든지 젖어 투명해져도 좋으니 꽁꽁 숨어버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했다. 언제든 나를 찾을 수 있는 거리에서 계절의 비가 기꺼운 산하엽처럼 얼마든 투명해지라 했다. 너는 하얀 내 꽃잎도, 투명해진 꽃잎도, 정성으로 가꾸어줄 것이라고.


  난 요즘 네가 어느 백사장에 놓인 벤치 같다는 생각을 해. 죽고, 다시 살아나서 또 죽어가는 파도를 줄곧 보며 너의 전부를 내어주는 낡은 나무. 나는 네 위에 그냥 몇 달이고 앉아있었던 거야. 바닷바람에 네 몸이 젖고, 썩어가고, 끝끝내 무너지는 모습을 모른 채로 그냥 멍하니 바다만 보고 있었다. 너는 매일같이 바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젖으면 투명해졌지만 너는 젖을수록 진해졌고, 나는 젖으며 한 뼘씩 자랐지만 너는 젖으면 한 켠씩 썩어갔다는 걸 그때의 나는 알 겨를이 없었어. 초겨울, 장마처럼 비가 내리던 날 너는 결국 백사장에 몸을 뉘이며 무너졌고 나는 늘 그랬듯이 네 옆에서 한껏 투명해진 채 피어있었다. 멍하게 치는 파도만 바라보면서 하루 종일 생각만 하는 게 나의 임무였어. 나의 투명을 사랑해준 너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데, 나는 또 자꾸만 투명해지려 한다.


  네가 없는 세상은 생각보다 다르지 않았어. 햇빛도 자주 나고, 비도 가끔씩 오면서 세상은 균형을 잘 지키고 있어. 네가 있던 백사장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녀. 나는 바다를 보면 자주 슬퍼져서 마음껏 젖어도 괜찮을 것 같을 때만 파도소리를 듣는다. 불 꺼진 텅 빈 방 안에 가만히 누워서 하루를 살아가는 날이기도 해. 살아가는 것보다 죽어가는 게 맞을까. 요즘은 이게 내가 투명해지는 방식인데 너는 이런 나라도 괜찮다 해줬을지 궁금하다. 가끔 태풍 같은 소나기가 오면 이러다 죽어도 좋겠단 생각이 들긴 해도 이제는 스스로 헤엄쳐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방법을 나는 알게 됐어. 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 투명한 나를 사랑하는 건 이제 네가 아니라 나의 몫이 되었지만 덕분에 그 방법을 알게 됐으니 그것으로 나는 족하다. 너도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어.


  두서도 없이 길게 늘어놓기만 했네. 나는 요즘도 자주 너를 찾는다.

  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나는 투명해진 꽃잎이 아니라 흰 꽃잎 가득 떨군 채 너의 옆에서 죽어갔으면 좋겠어.

  하얗게 시들어가는 나를 상상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곧 가을비가 울 것 같아. 안녕.


  - 너의 납골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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