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윽”
H가 벽에 부딪힌다.
하루에도 몇십 번을 들락날락 한 곳인데 안방 입구에서 또 콕! 이제는 시간이 꽤 지나 알 것도 같은데, 그는 늘 같은 곳에 부딪힌다. 그 정도 부딪히는 횟수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H는 아닌가 보다. '안 보인다'는 관념만으로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안 보이면 어떤지 난 모르고 있었다.
며칠 전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거실과 안방에 암막 커튼으로 전체가 가려져 있었다. 자러 가기 전 불을 껐는데 정말 칠흑 같은 어둠이 이것이구나 했다. 빛이 하나도 없고 거리감이 일도 없었다. 바로 앞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때다 싶어 난 불을 켜지 않고 걸어가 보았다. H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한 발자국 떼어본다.
한 발자국 같은데 성큼 1m는 걸은 느낌이 난다.
바로 안방 문을 생각하면서 저절로 손이 앞으로 나온다.
발보다는 손이 먼저 닿아야 한다는 생각은 무의식적 현상 같다.
또 한 발자국 가면 벽이 만져질 것 같았다. 그러나 허공이다.
좀 더 앞으로 몸을 내밀면 되겠지 하고 내밀었다. 그러나 또 허공이다.
답답함이 밀려오면서 무섭기까지 하다.
그리고 한발 '툭~' 내밀어 걷는데,
“으하하 앗!”
H가 며칠 전 부딪힌 안방 문 코너였다. 정말 아팠다. 팔이 코너를 지나 허공이어서 설마 그렇게 가까이 코너 벽이 있을 줄 몰랐다. 소름 끼치게 아팠다. 그리고 밀려오는 공포감! 공포영화 보는 느낌처럼 또 한 발자국을 넘어서면 또 부딪힐 것 같은 불안감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작은 경험이었고 아주 선명한 아찔한 기억이었다. 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한 것인지 부재를 경험하면서 그 중요성이 온몸으로 전달된 것 같았다. 그의 세계 안에는 내가 오늘 겪은 그 불안과 공포감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일까?
하루가 지난 다음 날, 나는 H가 그 벽을 향해 걷다가 부딪힐 뻔하는 상황을 또 목격하게 된다. 한 뼘도 안 되는 곳에서 가까스로 멈추는 걸 보고 배꼽 잡고 웃는다. 남들이 보면 '못된 아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는 이런 상황은 그냥 툭 먼지 털듯이 털곤 한다. 부딪히면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찜질도 해준다. 깊게 패인 상처를 보면 어쩔 땐 눈물도 핑돌 때도 있다. 그런데 반복적인 것들에는 진통제가 들어있는건지.. 점차 단련이 되는 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다행히 안 부딪쳤으니 웃으면서 이 순간을 함께 하려한다. 다행이기도 하지만 그의 천진한 표정과 몸짓이 또 웃게도 만든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가능한 좋은 쪽으로 웃으면서 해결하는 것이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지나간다. 서로가 이걸로 심각해지면 답은 없을 것 같다. 우울한 숲에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있을 수밖에.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가벼운 깃털'로 선택한다.
“오빠, 왜 늘 같은 방법인데 부딪힐까?”
“허공에 있으면 어디인지 정말 몰라. 지표가 벽인데 방까지 세 걸음이면 되는데 벽을 잡고 삥 돌 수는 없잖아. 대충 하는 건데 1년이 지나도록 감이 없네!”
“이번 전세는 좀 오래가면 좋겠다. 집이 바뀌면 또 헷갈리잖아. 그렇지?”
아직 집살 돈은 마련되지 않아 전세로 2년마다 이사를 하는데 갈 때마다 동선 익히는데 3개월 이상 걸리는 것 같다. 조금만 거실의 폭이 달라져도 적응하기가 만만치가 않다고 한다. 그의 무의식까지 거리가 전달되기란 시간이 꽤 걸리는 거 같다.
H의 움직임은 아이와 같다. 조심스럽다가도 거침없이 방향을 틀어 걷기도 한다. 알 수 없다. 그 세계는 잠깐 곁눈질로 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세계가 무슨 색인지도 난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그도 그렇다고 한다. 10살에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조금은 이 세계가 기억이 나는지 모르지만, 점점 색깔도 잊어버리고 있으니 이 화려한 삶을 점점 기억하기 힘들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세계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의 통로가 다소 폭이 좁고 다르지만 '같은 일상'을 보낸다. 난 이제부터 그가 좀 덜 다치게 조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