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물 없는 집
묵은 집에 들어오던 그 첫날밤을 기억한다. 일월 이십구일이던가. 하여간 귀때기가 얼얼할 만큼 몹시 추웠다. 감곡에서 무작정 최가 몰고 온 일 톤 트럭에 짐을 실었다. 묵은 집 사정이 어떠하리라는 건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았다. 원룸에서 나온 나는 무조건 묵은 집에 들어야 했다. 감곡에서 최와 순댓국을 저녁으로 먹고 남한강 묵은 집이 있는 강산마을로 향했다. 불안에 떨었던가. 그런 감정조차 사치였다.
묵은 집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나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 그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한 가지 생각에 굳건히 붙들려있었다. 오히려 근심을 표한 건 최였다. 짐을 다 부렸음에도 최는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다행히 전기는 들어왔다. 추운 밤이었지만 최의 얼굴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이런 데서 어찌 사람이 사나.(사람이 안 산 지 몇 해가 지난) 묵은 집을 일별한, 수심 어린 최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걱정 말라는 듯, 추운데 고생했다고, 최를 등 떠밀어 보냈다. 최가 떠나자 나는 곧장 부론면에 사는 화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묵은 집에 막 도착했으니 부탁했던 전기모터를 가져와 설치해달라고 말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내가 묵은 집에서 살게 된 것을 안 화가는 물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는 화가이면서 목수였다. 그림을 그려서는 생계가 안 됐기에 ‘그림 건축’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집수리를 주로 건축업을 했다.
원룸을 비우게 됐을 때 일 순위로 떠오른 묵은 집이었다. 몇 년 전에 출간했던 수필집 작가의 말에, 온 세상이 내 집이라고 큰소리쳤음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언제라도 유효했다. 귀때기가 떨어져 나가는 겨울밤에 묵은 집에 짐을 옮겨놓고 나서도 그 외침은 여전히 살아 꿈틀댔고, 내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온 세상이 내 집이라는 데 겁날 게 무언가. 밥 끓여 먹고 글을 쓸 수 있으면 나로선 족했다. 무얼 더 바라겠는가. 백 평짜리 아파트도 방 열 칸짜리 단독 주택도 필요 없었다. 책상을 들이고 글을 쓸 수 있는 단칸방이어야 집중도 잘 됐다. 방이 서너 칸 있어봤자 나에겐 애물단지일 뿐이다.
청소하고 치장하는 데 시간을 쓰는 집 노예라니! 쓸모없는 방을 떠안고 산다는 건 인생을 욕보이기로 작정한 멍청이들이나 할 짓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묵은 집이야말로 내 한 몸 살기에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고작 묵은 집에 터를 잡고도 희희낙락한다고 흉을 보더라도 나는 글 쓰는 공간은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부르짖으리라. 뭇사람들의 험담에 놀아날 만큼 나는 귓불이 얇지 않았다.
세상에서 추방당한 작가가 허세만 부린다고 쑤군대도 나는 한쪽 귀로 흘려버릴 작정이었다. 온 세상이 내 집인 나로서는, 쌀알만 한 묵은 집에 몸을 부렸으니 당분간 집 걱정은 고이 접어도 좋으리. 글쟁이라면 모름지기 그래야 하지 않겠나. 세상 인간들을 집에 들이고 부대끼며 씨름해야 할 작가라면, 온 세상을 집으로 거느려야 마땅하지 않겠나.
건넌방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나서야 화가는 도착했다. 그가 들고 온 수도 펌프용 전기모터를 보자 나는 곧장 모터값 십오만 원을 건넸다. 불온에서 오는 길에 화가가 새것을 사와 묵은 집에 설치해주기로 했던 바였다. 물만 들어온다면 아무리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이지만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이보다 더한 감곡 무릉골에서도 숱한 겨울을 나본 내가 아닌가. 움막생활에 서툴던 한겨울에 부엌문을 열어놓고 잤다가 이튿날 꽁꽁 얼어붙은 수도를 녹이느라 불을 지피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았던가.
그 경험도 있기에 먹을 물만 부엌에서 쏟아져 나온다면, 전기모터가 시원스레 지하수를 끌어올려만 준다면, 한겨울을 나는데 한걱정은 덜 수 있으리라. 전기, 군불, 그리고 먹을 물. 생존하는 데 갖춰야 할 최소한 것들! 나는 화가가 가져온 전기모터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옛집 주인이 부엌에 심어 놓고 잘만 먹고살았다는, 철석같이 믿었던 그 수도가 말썽이었다.
과거에 썼던 수도 파이프에 전기모터를 연결하고 줄기차게 시동을 걸었건만 수도꼭지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기계치인 나로서는 화가의 손끝만 바라보며 애를 태웠는데, 무려 한 시간이 넘도록 이것저것 여러 방법을 동원해도 지하수를 뿜어내야 할 수도는 콸콸 소리만 터뜨릴 뿐 물을 토해내지 않았다.
“지하수가 말라버렸나?”
전기모터와 씨름하던 화가가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엎어지면 코앞이 남한강인데 지하수가 마르다니. 모래 섞인 물만 찔끔찔끔 솟는 수도꼭지를 노려보던 화가는 혀를 빼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의 솜씨를 믿었다. 몇 해 전, 헌 집을 사들인 지인의 단칸방을 욕실로 바꾼 것을 보았던 터였다. 다 쓰러져가는 그 집에 딸린 단칸방을 화가는 타일을 깔고 변기를 집어넣은 멋진 욕실로 변신시킨 적이 있었다.
마술사의 손 뺨치던 그의 솜씨를 진작 알기에 나는 화가의 얼굴에 수심이 짙을수록 초조했다. 나로서는 거금 십오만 원을 들인 전기모터였다. 물 문제 해결사로 여겼던 전기모터가 눈앞에서 무용지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 전기모터로 부엌 수돗물을 쓰지 못한다면 물은 어찌한다? 옛집에서의 생존이 위태위태해지는 건가. 당장 먹을 물이 있어야 내일 아침에 라면이든 뭐든 끓여 먹을 게 아닌가.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가는 전기 스위치를 눌렀다 껐다 해가며 전기모터를 작동시키려고 갖은 애를 썼다. 지하수가 말라버렸다면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 나오는 건 전기모터가 불량품이어서도 아니고 화가의 잘못도 아니었다. 화가는 할 만큼 했다.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그만합시다. 겨울이라 물이 말랐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