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베 Aug 08. 2024

쓰는 인간

1 부러진 이

이가 부러졌다. 윗니 하나가 부러졌다. 눈이 소복이 내린 겨울밤이었다. 그날 집필실을 찾아온 손님은 지리산 구례에 사는 철근공 시인 김이었다. 한겨울에 담양 외진 산골에 틀어박힌 나를 위로한답시고 술과 안줏거리를 들고 이른바 ‘위문공연’을 온 것이었다. 집을 떠나 타지에서 집필에 몰두하는 글쟁이를 방문하는 벗들의 행차를 우리는 위문공연이라 불렀다. 자판 붙들고 씨름하는 동업자를 격려하자는 벗들의 갸륵한 뜻을 누가 물리칠 수 있으랴! 자판 쪼아대는 소리만 적막을 깨던 집필실은 술상 차린 공연장으로 이내 변신했고, 주객이 술과 입담으로 어우러져 흥건해지기 마련이었다.


 눈 내리는 그 밤, 나를 위해 기꺼이 공연에 출연한 배우로는 김 시인과 전직 교사이자 학원 강사였던 시인 송 아무개, 한옥 짓기에 인생을 걸었다는 ‘돌싱’ 사내 추 목수였다. 돌싱이라는 말이 나왔기에 하는 말인데, 중년 사내 넷이 앉았건만 하나같이 여자 없이 혼자 사는 처지였다. 나로 말하면 아예 결혼하지 않았고, 시인 김과 송은 이혼한 지 십여 년이 넘었고, 추 목수는 돌아온 싱글임을 강조하며 손수 지은 한옥에 들어 앉힐 안주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노라고, 돌싱임을 포기한 두 시인과 자신을 한 꿰미로 보지 말라고, 이혼남도 급수가 있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안주로 올랐던 홍어와 꼬막이 반나마 줄었던가. 송 시인이 거처를 옮기고 시민 교양강좌 강사 노릇으로 주당 십만 원 벌이를 한다 했던가. 김 시인이 심청가 한 대목을 뽑았던가. 나는 불현듯 통유리로 채운 창문에 눈을 던졌는데, 바깥세상은 어느새 어둠살이 짙었다. 삼면 벽이 책장으로 빼곡한 집필실 거실은 취기 서린 우리들의 달뜬 목소리만 중구난방 떠돌고 있었다. 시나브로 남도 정이 물씬 밴 벗들의 위문공연에 나는 흠뻑 젖어 들고 있었다. 


제주 강정마을 도보 행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학원 강사를 때려치웠다는 송 시인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던 참이었다. 우리는 불행에 일격을 당한 시인의 삶이 안타까워 막걸릿잔을 부딪쳤고, 나는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고 꼬막 한 점을 입으로 집어넣으려는 찰나였다. 입천장에 댔던 혀끝이 잇몸으로 미끄러졌던가. 무언가 허전하다 싶은데, 철심 같은 이에 걸려야 할 혀끝이 날름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거듭 혀끝을 들이대도 마찬가지였다. 아뿔싸! 윗니 하나가 부스러진 것이었다, 그것도 통증도 못 느끼게 스리슬쩍,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이 은밀하게! 술이 아니라 밥을 씹고 있었다면 밥알과 부서진 이가 섞여버렸을 거였다. 


그만큼 나는 이가 부러진 순간을 체감하지 못했다. 어라? 이건 뭐지? 잠시 황망한 느낌에 사로잡혔는데 혓바닥에 부스러진 이 조각이 쌀알처럼 잡혔다. 아, 이가 부러졌구나, 윗니가 부러졌구나. 그제야 나는 취중일망정 뒤늦게 이가 부러졌음을 실감했고, 그 사실을 퍼뜩 깨닫지 못한 미련퉁이인 자신을 타박하는 한편 엄중한 사태임을 스스로 각인시키기라도 하듯, 이가 부러졌어, 이가 부러졌노라고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이 조각을 혓바닥에 머금은 채 나는 부러진 윗니에 혀끝을 다시 들이댔다. 예상대로 휑하니 뚫린 이 틈새를 빠져나간 혀끝이 미끈둥하며 입술 안쪽에 닿았다. 


아, 정말로 이가 부러졌구나. 혀끝 감촉으로는 왼쪽 윗니 하나가 반쯤 부러진 게 확실했다. 나는 그때까지 혓바닥에 물고 있던 이 부스러기들을 조심스레 손바닥에 뱉었다. 쌀알만 한 이 몇 조각이 손바닥에 모였다. 나는 그것들을 처연한 심정으로 잠시 굽어보았다. 벗들이 눈치 안 채게, 손가락을 둥글게 만 나는 쌀알만 한 녀석들을 눈으로 할금댔는데, 부러진 이 조각이 틀림없었다. 나는 내 잇몸에서 떨어져 나온 녀석들을 품은 손을 슬며시 그러쥐었다. 마치 값비싼 다이아몬드나 되는 듯이 말이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이가 부러진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막걸리 주전자가 술상을 오가고 누군가 홍어 살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가는 데도 나는 이가 부러졌어, 윗니 하나가 반쯤 부러져나갔다고, 속엣말을 중얼거리며 상황 파악을 하려고 애썼다. 취기에 젖었긴 해도 아, 살다가 이가 부러진 적이 있었던가, 글을 쓰다가 이가 부러진 적이 있었던가,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이가 부러진 적은 없었다. 성인이 된 뒤로 생니가 부러진 적은 없었다. 썩은 이야 벌써 몇 개 내 잇몸을 빠져나갔다. 


오래전부터 알아 온 후배 치과의사를 만나러 갔다가 진료실 의자에 앉으라고 해서, 이 스케일링만 하자고 해서 떡하니 진료 의자에 누웠다가, 후배 의사에게 사랑니와 어금니를 뽑힌 적이 있었다. 후배가 이를 뽑아야겠다고, 부실한 윗니 아랫니를 가리킬 때도 나는 변변한 항변도 못 하고 내 이를 후배 치과의사에게 맡겼다. 그때 이가 빠져나간, 숭숭 뚫린 잇몸을 혀로 핥으면서도 나는 조금 서운할 따름이었지, 생의 한 축이 허물어진 듯 황망하지는 않았다. 

이전 04화 역전여관 마네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