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물 없는 집
“물 길으러 갑시다.”
전기모터를 포기한 화가가 말했다.
“물 길으러요? 아니, 이 밤에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쓸모없어진 전기모터에 맥이 풀린 나는 물 없는 집에 막막해하고 있었다. 화가는, 내일 당장 먹을 물이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니냐고, 아무 집에라도 가서 물을 얻어 와야 하지 않겠냐고, 씨근대며 물통을 챙겼다. 그래, 부엌 수도는 포기하자, 지하수가 말라버렸다는데 어찌할 건가. 물 없인 하루도 살 수 없지 않은가. 다행히 부엌 수돗가에는 각종 물통이 넘쳐났다. 꼬맹이들 목욕탕으로 써도 넉넉한 플라스틱 대형 함지박부터 막걸리 한 말을 담았을 흰 물통과 양동이까지 다양했다.
화가와 나는 물통을 두 개씩 움켜쥐고 묵은 집 뒤꼍을 올랐다. 산자락 밑 요양원엔 불이 환했고, 그 아래쪽 민가에도 불빛이 듬성듬성했다. 강추위를 뚫고 화가가 앞장섰다. 그는 지하수를 끌어올리지 못한 게 자신의 책임인 양 남한강이 지척인데 지하수가 마른다는 게 말이 되냐고 불만을 토했다. 그렇다고 남한강에서 물을 퍼와 식수로 쓸 수는 없었다. 나는 화가가 자책하지 않기를 바랐다. 솔직히 화가에게 미안했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 추운 겨울밤에 수돗물을 나오게 해주겠다고, 자기 일처럼 나서준 그가 고마웠다. 전기모터도 사다 주었고, 지인들과 몇 차례 들락거린 화실에서 안면을 익혔다고 돈을 안 받고 일을 해준 화가였다.
나는 그의 화실에 걸린 작품들을 선명히 기억했다. 이삼 년에서 오 년쯤 묵은 유화들이 대부분이었다. 물감은 우그러뜨린 채로 굴렀고, 꼬들꼬들 말린 붓들은 언제 붓질했는지 하나같이 말라비틀어졌다. 붓을 든 게 언젠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는 그는 과연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이 올는지 자신 없어 했다. 그림 그리자고 밥벌이로 건축 일을 시작했거든요, 헌데 망할 놈의 현실은 악착같이 그림을 못 그리게 하네요, 화가가 허허롭게 웃었다.
요양원을 보며 오르던 길목에서 첫 번째로 만난 집에서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문을 두드리자 남자 노인이 문을 열어주었고, 물통을 들고 난데없이 들이닥친 두 사내를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라고, 얼마든지 물을 길어가라고, 집안으로 선뜻 우리 두 사람을 들였다. 온기가 도는 안락한 집안 분위기가 내가 든 집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나는 저 아래쪽 집에 살러 들어온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고, 그 와중에도 노인 부부는 동네에 젊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화가가 말을 하다 말았다. 물통 두 개를 양쪽 손에 쥐고 끙끙대며 내려오는 길이었다. 하마터면 물통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의 속내를 어림짐작한 나는 신음처럼 뱉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치 남 얘기하듯 답변이랍시고 했던 것인데, 뱉고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무엇을 하자는 걸까?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중뿔난 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나 때문에 화가까지 고생시킨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화가에게 묻고 싶었다. 그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림 건축에 출근할 게 아니라 화실에 틀어박혀야 하지 않냐고, 닦달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화가가 내게 하다가 만 말을 물통을 들고 오는 내내 곱씹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그래, 나는 무얼 하자는 걸까?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