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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베 Aug 10. 2024

역전여관 마네킹

5 핸드백

역전 곱창 구가 제 발로 나타난 건 밤 열두 시가 훌쩍 지나서였다. 텔레비전을 끄고 요를 까는데 여관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 역전 곱창 구가 죽을상이었다. 

“노 사장, 날 좀 살려주소. 마네킹이 나타났어. 우리 가게 앞에.”

이불을 펴려던 노순우는 그 자리에서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코털에 이어 역전 곱창이라니. 다음엔 또 누군가? 뭐가 잘못된 걸까? 누구 짓인가?

“마네킹이 안 움직여. 노 사장, 어떻게 좀 해줘 봐. 내가 말이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야. 당구장 강이 하도 성화기에 할 수 없이 나섰던 거야.” 역전 곱창 구가 겁에 질려 울먹거렸다. “세입자 주제에 별 수 있어. 노 사장, 면목 없지만, 마네킹 좀 없애줘. 올봄에 우리 딸 결혼해. 애 시아버지 될 양반이 와서 마네킹 보고 갔어. 우리 딸 파혼당하게 생겼다니까. 애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냐. 딸애한테 얼굴을 못 들게 생겼어. 제발 부탁이야. 내가 이렇게 싹싹 빌 테니까.”     



그날 밤 새벽녘까지 뒤척이던 노순우가 향한 곳은 여관 출입문 앞에 선 여자 마네킹이었다. 무심코 마네킹 어깨에 손을 얹으려던 그는 얼른 거두어들였다. 혹시 안 움직이면 어쩌나? 이제껏 해보지 않은 의심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그는 마네킹을 만지기를 포기했다. 영하의 날씨에도 가발을 뒤집어쓴 여자 마네킹은 칼바람에 쓰러지거나 휘청이지 않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켜왔다. 당신은 알아? 생맥주 최에 이어 역전 곱창 구의 마네킹이 나타난 걸? 한낱 플라스틱 마네킹이 사람들 인생에 개입했다니까. 


놀랍지 않아? 내 코가 석 자인데도 이 사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모르겠어. 심지어 역전 곱창은 내가 저 닮은 마네킹을 세운 줄 안다니까. 내가 그런 오해를 사야 하겠어? 당신 친구들이 어쩌자고 줄줄이 왕림하셨을까? 당신이 추운 날 고생하는 거 알아. 그리고 당신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도 모르지 않아. 나도 당신 원망 많이 했어. 아마 누구보다 당신을 못 마땅히 여긴 게 나일 거야. 여관 영업 못 한다고 원통하게 죽은 당신을 눈엣가시로 여겼으니까. 비참하게 죽은 당신 인생은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못하고 말이지. 노순우는 여자 마네킹을 어찌 대해야 좋을지 몰랐다. 경찰 수사용 마네킹일 뿐이라고 단순히 여겼다가도 생맥주 최가 그랬듯 산 사람으로 느껴지는 데야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었던 여자 마네킹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가발을 쓰다듬어 줘야 할지, 추운데 고생한다고 시린 손을 잡아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생맥주 최는 코털 마네킹이 자기와 똑같은 인간으로 느껴져 무섭다고 했다. 산 사람인 생맥주 최가 그런 기분이라면 죽어서 마네킹으로 서 있는 여자는 어떨까?


 노순우는 미처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여관 영업 못 한 것만 속을 끓였지, 여자의 인생은 미처 돌보지 못했다. 후회스러웠다. 어깨라도 다독여 주려던 그는 차마 손을 얹지 못하고 머뭇머뭇했다.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코털 마네킹처럼 안 움직인다면? 들었던 팔을 내린 노순우는 마네킹에 손을 대려던 마음을 접고 돌아섰다. 이제라도 빈방에 여자 마네킹을 재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미친놈 소리를 듣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여자 마네킹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이고 돌아섰다.     




핸드백이 없어졌다. 여자 마네킹 팔목에 얌전히 있어야 할 연둣빛 핸드백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빙판으로 변한 길바닥에 연탄재를 막 던지고 발로 으깰 참인데 여자 마네킹이 어딘가 휑하니 허전했다. 무슨 조홧속인가 하고 눈여겨봤더니 장식물 하나가 없었다. 연둣빛 핸드백.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차이면서도 노순우는 뜻하지 않은 도난 사건을 어찌 처리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담당 형사는 농지거리일망정 마네킹을 분실하거나 훼손하면 역전 여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못 박지 않았나.


 노순우는 이틀을 꼬박 끙끙 앓았다. 그 많은 행인은 물론 이웃 상인들도 핸드백이 없어진 사실을 눈치챈 이가 없었다. 자기 얼굴 닮은 마네킹을 맞닥뜨린 부동산 박은 충격이 컸던지 사람이 하루아침에 말을 잃어버렸다. 부동산 사무실 앞에 진을 친 그의 마네킹엔 아이들 구경꾼들이 몰려 와 북새통이었다. 부동산 박의 초등생 자식들 친구들이라는데 쫓아내기는커녕 망연자실 바라볼 따름이었다. 학교에 안 가겠다는 아들딸을 달래기에도 허덕이는 그에게 마네킹 핸드백 도난 사건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부동산 박 마네킹이 출현하면서 이웃 상인들의 관심은 단연 다음엔 누구 차례인가? 에 쏠렸다. 생맥주 최가 부동산 박과 역전 곱창 구를 불러 머리를 싸맸어도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은 경찰을 불러들이는 덴 한사코 반대했다. 


생맥주 최와 역전 곱창은 날마다 손님들에게 이끌려 나와 자기 닮은 마네킹에 얼굴을 바투 대고 억지웃음을 짓는 것으로 매상을 올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웃는 그들도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맥주 최는 자신은 생맥주 장수라고, 역전 곱창은 곱창 장수라고, 새삼스레 각자 고유업종을 들먹이며 호소했음에도, 손님들의 관심은 줄어들 낌새를 안 보였다. 정체성 혼란을 불러올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의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뚜렷한 탈출구가 없다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들은 마네킹 옆에 서라는 손님들 요구를 언제나 그렇듯 물리치지 못했다. 각자의 마네킹만으로 골머리를 앓는 그들에게 핸드백 도난 사건이 먹힐 리 없었다. 노순우는 경찰에 신고할지 말지 고민을 거듭했다. 



핸드백 없이 서 있는 여자 마네킹을 보면 볼수록 노순우는, 자신의 귀중품이랄지, 때로는 손목이 뭉텅 잘린 듯한 까닭 모를 상실감에 마음이 몹시 언짢았다. 하루빨리 잃어버린 핸드백을 여자 마네킹 팔에 안겨 주어야 했다. 기왕 역전 여관 마네킹으로 소문난 바에야 온전한 모습을 되찾아 주어야 했다. 역전 여관 주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몫이라는데 노순우는 거리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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