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베 Aug 08. 2024

쓰는 인간

3 소설로 지은 집

주인 없는 집에 함부로 들어서지 말라고, 나무작대기를 질러놓았던 문짝 없는 대문을 통과하자 여전히 풀이 발목에 서걱거렸다. 나는 휴대 전화 불빛에 드러난 평상을 지나 돌계단을 올랐다. 보아하니 집은 지붕이 날아가거나 부엌 문짝이 떨어져 나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어둠을 걷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자면 먼저 전기부터 확인해야 했다. 휴대 전화 불빛을 비추니 처마 밑기둥에 달아놓은 외등이 보였다. 


나는 손으로 더듬어 흰 갓을 쓴 외등 스위치를 눌렀다. 외등은 꿈쩍도 안 했다. 몇 차례 스위치를 껐다 켰다를 되풀이했지만, 외등은 내 바람을 저버렸다.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전기 계량기 확인. 그러나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휴대 전화 액정 불빛이 까무룩 꺼지고 말았다. 나는 폴더를 닫았다가 휴대 전화 액정 불빛을 되살려냈다(스마트폰이었다면 손전등 기능을 사용해 불을 밝혔으련만 나는 구닥다리 폴더 폰을 쓰고 있었다). 군불 때는 아궁이에 얹힌 솥단지가 무사함에 안도하며 평상을 지나 작은방 쪽문이 나 있는 샛길로 발길을 꺾었다. 


거기 뒷간과 마주한 굴뚝이 솟은 처마 밑에 전기 계량기가 있음을 용케 기억해냈다. 무릎을 덮는 풀을 헤치고 굴뚝에 오른 나는 전기 계량기가 붙어 있을 만한 벽면에 휴대 전화 불빛을 들이댔다. 그러나 전기 계량기 대신 내 눈에 띈 건 누전차단기였다. 나는 누전차단기 스위치를 여러 차례 올려봤지만, 외등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전기가 나간 것이었다. 아니 전기가 끊긴 것이었다. 


순간, 아찔했다(차마 눈앞이 깜깜했다는 식으로는 말 못 하겠다). 전기가 나가다니, 전기가 안 들어오는 집이라니! 한여름에 냉장고도 안 돌아가고, 노트북도 못 켜고 전구에 불을 밝히지 못한다면, 강변 집은 더는 집이 아니었다. 양철지붕은 녹슬었고, 아궁이에 얹은 가마솥도 언제 구멍이 날는지 모르고, 뒤틀린 부엌 문짝이 바람에 덜컹거려도, 물을 수도계량기에 호스로 연결해서 받아먹을지라도(묵은 집은 남한강이 바로 옆이건만 수돗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마을에는 지하수를 끌어올린 공동수도가 있는데, 묵은 집에도 수도계량기가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계량기에서 부엌을 잇는 수도관 공사를 하지 않았기에 수도계량기는 있으나 마나였다. 그렇다고 물을 안 먹고 살 수는 없는 법. 일종의 편법이랄까,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인 수도계량기 앵글밸브를 따고 호스를 연결함으로써, 나는 수도관 속으로만 흐르던 물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부뚜막과 천장을 그을음이 꺼멓게 칠했어도, 책상에 노트북을 놓고 글을 쓸 수 있으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집이었다. 먹통이 된 전화기 꼴이랄까, 용도 폐기된 가전제품 꼴이랄까, 노트북을 켤 수 없는 집은 폐기물이나 진배없었다. 오늘부로 폐가가 된 건가? 우두망찰한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음을 던졌다. 폐가란 곧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 아니던가. 강변 집은 폐가다! 라고 과감히 선언하려던 나는 멈칫거렸다. 지금 집을 단죄하고 있을 때인가. 그러기에는 내 처지가 너무 옹색하지 않은가. 


집을 폐기물 취급하기에 급급했던 나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내 꼬락서니를 곰곰이 돌아보게 되었다. 집이 폐기물이라면 여기서 오늘 밤 잘 수 없다는 것이고, 내일부터라도 당장 살 집을 구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잠깐 사이에 나는 집 없는 인간으로 전락했고, 그 꼴을 친구 김에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생생한 현실이 나를 엄습하자 수치심으로 몸 둘 바를 몰랐는데, 어둠이 얼굴을 가려주어 그나마 다행이랄까. 문밖에 있는 김이 집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그 와중에도 나는 내 삶의 한 자락을 감춰준 밤에 감사했다.     




“이십일 세기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김이 말했다. 그는 사람 사는 집에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나는 글쟁이가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오늘 일 꼭 소설로 쓰시게. 정말 황당하군. 자네 아니면 누가 이런 일 겪겠어.”

“그래야지!” 나는 즉시 답했다. “소설로 꼭 써야지.” 

언제 그랬냐 싶게 힘이 불끈 솟았다. 조금 전만 해도 살던 집을 폐기하고, 하룻밤 묵을 데를 걱정했던 인간이 그 상황을 소설로 쓰리라 다짐하다니, 도저한 이 낙천성은 어디에 처박혔다 터져 나오는 걸까.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고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을 잊은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에 겪은 일이 아닌가. 지금도 집은 그 자리에 버티고 있지 않나.      


나를 이 상황으로 몰고 온, 이 운명을 주관한 이의 정체는? 

우주에 그 어떤 존재가 나를 여름밤에 전기 나간 집으로 내몰았을까. 마치 당신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세계로 이끌어주겠으니 실컷 즐기라고 말이다. 전기 계량기 없는 집에 무릎을 꿇으면 집 없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고, 반면에 실망을 딛고 글쟁이 본능을 발휘한다면 축복받은 밤이 되리라고! 소설이라는 우주로 나를 휘몰아 넣는 그 신비한 손길을 거부하기에는, 나라는 인간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오늘 밤에도 드러났듯, 집 때문에 삶에 위기가 닥쳤음에도 거기에 소설이 끼어들면 순식간에 고통은 기쁨으로 돌변한다. 그 마법 같은 순간을 한두 차례 겪은 게 아니다.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