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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베 Aug 10. 2024

역전여관 마네킹

4 코털 마네킹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불법 광고물로 판정했음에도 코털 마네킹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시들 줄을 몰랐다. 철거 통보를 받은 생맥주 최는 보도블록을 건드리지 않고 코털 마네킹을 들어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써봤지만 허사였다. 날이 갈수록 코털 마네킹 사연을 알게 된 사람들의 발걸음이 생맥줏집으로 향했고, 손님들은 코털 마네킹과 생맥주 최를 비교해 가며 즐겁게 생맥주잔을 부딪곤 했다. 가수로서 정체성 상실을 고민한 생맥주 최가 부댓자루로 코털 마네킹을 덮어씌우면 손님들은 냅다 부댓자루를 걷어버리고 낄낄대기 일쑤였다. 


손님들의 항의를 받은 생맥주 최는 그 짓도 그만두었고, 급기야 취객들에게 이끌려 코털 마네킹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이르렀다. 손님들에게 등 떠밀려 나온 생맥주 최가 코털 마네킹 옆에 서면 노순우는 빠지지 않고 구경했다. 척 봐도 코털 마네킹은 영락없는 생맥주 최였다. 일류 조각가가 솜씨를 발휘한다 해도 코털을 기막히게 살린 그 얼굴을 더는 감쪽같이 빚어낼 수 없을 터였다. 손님들이 여자 마네킹과 코털 마네킹이 잘 어울린다고 놀릴라치면, 기겁한 생맥주 최는 노발대발했다. “멀쩡한 총각 죽는 꼴 보려고 환장했냐! 어디 여자가 없어 살해당한 여자로 사람을 가지고 놀아!” 그가 은연중 코털 마네킹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여지없이 드러냈달까. 어쨌거나 생맥주 최는 코털 마네킹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었고, 노순우로서는 생맥주 최에게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다. 


코털 마네킹과 어깨동무하라는 손님들의 요구에 몸을 사리던 생맥주 최가 끌려 나온 날, 노순우는 생맥주잔을 들고 마네킹 놀이에 합세했다. 생맥주잔을 비울수록 누가 마네킹인지 사람인지 헷갈렸다. 생맥줏집이 손님들로 들끓을수록 기분이 좋았고,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날도 생맥주 최는 손님들의 부탁대로 코털 마네킹과 나란히 섰고, 웃으라는 요구가 빗발칠수록 억지웃음이 번진 그의 얼굴이, 코털 마네킹을 쏙 빼닮았음에 노순우는 감탄을 연발했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생맥주 최에게 생맥주잔을 들어 보인 노순우가 생맥주를 쭉 들이켜고 입을 손으로 훔치자, 문득 여관 출입문 앞에 여전한 여자 마네킹이 눈에 들어왔다. 취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버릇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신은 코털 마네킹을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알아?”     

“형님, 전 도장 안 찍었습니다.”

500cc 생맥주잔을 들이댄 생맥주 최가 다짜고짜 말했다. 노순우는 잔을 부딪곤 입술만 축였다. 생맥주 최가 생맥주를 권하며 자신에게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좀 전에 생맥줏집을 나서던 역전 곱창 ‘구’와 생맥주 최가 다투던 것을 노순우는 우연히 지켜봤었다. 생맥주 최에게 손에 쥔 종이 쪼가리를 흔들어 대며 목청을 높이던 역전 곱창 구가 노순우와 눈이 마주치자 허둥지둥 내뺐다. 할 테면 해보라, 눈 하나 깜짝하나. 각오를 다지며 여관으로 들어가려던 노순우를 생맥주 최가 붙들었고, 속절없이 생맥줏집에 자리 잡은 거였다. 


노순우는 굳이 생맥주 최가 변명하지 않아도 역전 곱창 구가 연판장을 돌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오전에 지성 서점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역전 곱창 구가 마네킹 때문에 영업 손실이 크다면서 역전여관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 동의를 받는 연판장을 돌리고 있음을 말이다. 그 역전 곱창 구가 생맥주 최에게 연판장에 서명받으려다 보기 좋게 퇴짜를 맞은 것이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노순우가 그 현장을 보았고. 


생맥주 최는 왜 연판장에 도장을 찍지 않았을까. 마네킹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고 앞장서서 징징댄 게 그가 아니던가. 얼씨구나 하고 역전여관이 책임을 지라는 연판장에 동의했어야 할 생맥주 최가 거부한 까닭이 노순우는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형님, 보시다시피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르는 마네킹 때문에 입었던 손실을 쬐끔 회복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왁자지껄한 손님들을 가리키며 생맥주 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불안하고 초조하달까요. 모르겠어요, 저도 왜 제가 연판장에 도장을 안 찍었는지. 솔직히 마네킹 말고 더한 게 나타날지 누가 알겠어요?”

“마네킹보다 더한 거라니?”

“글쎄,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요. 저요, 요즘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라구요. 솔직히 은근히 두렵기도 해요.”

“두려워? 왜?”


“여자 마네킹이야 경찰이 세웠다 쳐요. 근데, 저 닮은 마네킹은 뭐냐구요? 하필이면 왜, 저냐구요? 그냥 마네킹이면 제가 이러지 않아요. 코털까지 박아 넣었잖아요. 거기다 두 발에 철심을 심기라도 했는지 꼼짝을 안 해요. 저 물건을 제가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죠? 손님들한테 붙들려 나갈 땐 혀 깨물고 칵 죽고 싶은 심정이라구요. 그 짓도 하루 이틀이지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하룻밤에도 서너 차례 끌려 나간다고요. 제가 무슨 삐에로입니까? 아님, 손님들 노리개입니까? 술에 취한 인간들이 마네킹한테 가자고 저를 부르면 쪽팔려서 장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니까요. 장사? 지금 장사가 문제가 아네요. 저 물건이 계속 저기 서 있으리라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해요. 밤에 잠에 안 와요. 상조회 회원들은 솔직히 제 심정 몰라요. 형님은 아실까 모르지만. 형님, 그거 아세요? 그 양반들 요즘 속이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다는 거?”


“속이? 왜?”

“모르셨어요? 제가 당했는데 그 사람들이라고 속 편하겠어요? 다들 자기 닮은 마네킹이 가게 앞에 나타날까 봐 전전긍긍한다니까요. 어젯밤에 행복 약국 조 약사가 찾아왔어요. 자기 닮은 마네킹이 꿈에 나타났다는 거예요. 신축 건물에 입주할지 말지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걱정이 태산이더라구요. 역전 곱창 구 사장 그 양반, 모자란 건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지, 연판장이 뭡니까, 연판장이. 마네킹 줄줄이 불러들이려고 환장했으면 모를까. 저요, 가게 앞에 떡 버티고 선 저놈만 보면 미치겠어요. 코털을 밀든지 해야지, 저놈 코털만 보면 속이 뒤집혀요. 저요, 하루하루가 정말 죽을 맛이라니까요.”

“그럼, 아우님은 마네킹이 또 생길 거라는 거야?”

“연판장 돌리는 꼴 보세요. 아예 마네킹 불러 모시자고 굿을 하잖아요.”

“흠, 마네킹을 불러들인다? 역전여관 폐업을 부추기는 연판장을 돌리는데 어째서 마네킹이 나타날 거라고 걱정하지?”


“아, 절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제가 여자 마네킹 때문에 장사 안된다고 형님을 들들 볶았잖아요. 상조회 사람들, 불안불안해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걷는 기분일 거라구요.” 

“마네킹이라, 제2 제3의 코털 마네킹이 나타날 거라.”

노순우는 생맥주 최의 말을 곱씹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점이 켕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그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마네킹이 역전여관 출입문에 서 있는 상상을 일찍이 해봤었다. 소름이 돋았고, 얼굴 들고 못 살겠구나, 장탄식이 절로 나왔었다. 코털 마네킹으론 그 절박함을 실감 못 했다. 노순우 마네킹을 떠올리자, 대번에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 하고 몸서리를 쳤다. 

자기 얼굴을 빼닮은 마네킹을 날마다 보는 심정이 어떨까? 

게다가 가게 문 앞에서 붙박이로 꼼짝을 안 한다면 말이다. 생맥주 최가 죽을 맛이라고 고통을 호소하는 그 일이 막상 내게 닥친다면?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노순우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말이지, 아우님 닮은 마네킹이 정말로 그렇게 두려워?”


“형님도 한 번 겪어보시면 바로 알아요. 그거요, 말로는 설명하기가 참 그래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간밤엔 이제껏 살아온 날들이 영화 필름처럼 좍 펼쳐지는 거 있죠. 혹시 남한테 해코지한 거 없나, 죄지은 거 없나, 벌 받을 짓 한 거 없나, 별별 잡생각을 다했다니까요. 솔직히 제가 형님 쬐끔 못살게 굴긴 했잖아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느 날 갑자기 내 얼굴하고 똑같이 생긴 마네킹이 가게 앞에 나타난다. 사람들은 놀려 쌓지, 어디서 왔는지도 몰라. 꼼짝도 안 해. 없애버릴 수도 없어. 거지발싸개 같은 쪽팔림을 언제까지 감당해야 할지도 몰라. 형님, 잠들기 전에 제발 내일은 마네킹이 없어지기를 기도하는 심정이 어떤지 아세요? 


눈뜨면 마네킹이 자리에 없기를 애타게 비는 심정을 아시냐구요? 저요, 요즘 먹지도 자지도 못해요. 정신적으로 너무너무 피곤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라니까요. 이건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구요. 나하고 똑같이 생긴 인간을 보는 느낌도 이러지는 않을 거예요. 기분 아주 더럽다니까요. 플라스틱 마네킹일 뿐인데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나라는 놈이 벌거벗고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받는 거 같기도 하고 참 지랄맞아요. 옆에 서면 제게 말을 거는 느낌도 들고 으스스해요. 무섭다니까요. 진짜 사람 같다니까요. 저놈이 친구 먹자고 할까 봐 겁이 난다면 말 다 했죠.”

“근데, 아우님. 코털 마네킹을 누가 가져다 놨을까?”

“코털 마네킹? 아우, 진짜 미치겠네. 형님,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으세요? 제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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