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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베 Aug 09. 2024

역전여관 마네킹

3 코털 마네킹

“이러시면 안 되지.”

불이 켜져서 들어와 봤다는 부동산 박이, 흙손으로 시멘트 모르타르를 구들장에 바르는 노순우를 보며 느물거렸다. 노순우는 흙손을 거두어들였다. 연탄가스 새는 안내실 구들장 금 간 데를 시멘트로 때우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부동산 박한테 들킬 건 뭔가. 이웃 상인들 입질에 오를까 봐 밤늦게 남들 몰래 작업을 했던 터였다. 장판을 둘둘 말아 거둔 방바닥에, 세숫대야에 이긴 시멘트 모르타르 하며 어수선한 안내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역전여관 민낯을 보인 듯해서 노순우는 부동산 박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노 사장, 궁상떨 거 뭐 있어. 이참에 여관, 당구장 강한테 넘기고 팔자 고쳐. 역전여관 낡았잖아. 그렇게 땜질한다고 호박이 수박 되겠어? 당신만 결심하면 낙후한 상가들 싹 허물고 대리석으로 처바른 신축 건물에서 다들 장사할 수 있잖아.” 

목장갑을 벗은 노순우는 생맥주 최보다 한술 더 뜨는 부동산 박에게 몹시 서운했다. 신축 건물에 여관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것은 전문가인 그가 더 잘 알 거였다. 여관을 집어치우라고? 남이야 어찌 되든 건수만 올리겠다, 이거지? 부동산 박의 속내를 꿰뚫어 본 노순우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니할 말로 수사 장기화하면 소문만 더 나빠진다구. 역전여관 값이 떨어진다, 이거야. 마네킹이 있는 한 여관 영업 못 해. 당구장 강이 청자 다방 유 마담한테도 점포 하나 내주기로 했다잖아. 유성 레코드, 역전 곱창, 지성 서점, 행복 약국, 코털 생맥줏집, 죄다 신축 건물에 입주하기로 예약했다니까. 역전 곱창이 뭐랬는 줄 알아? 여관 땜에 장사 안돼서 돌아버리겠다잖아. 그뿐이 아냐. 황해횟집은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팔 걷어붙이고 나설 참이야. 당구장 강이 좋게 쳐준다고 할 때 눈 딱 감고 팔아. 연탄공장도 없어진다니 좀 좋아.”



철길과 잇닿은 연탄공장이, 철거 확정이 났다는 건 노순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역 광장 동쪽인 역전여관 상가는 연탄재가 날리는 바람에 신축 건물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대한극장, 대한통운 하역장, 한국전력이 들어선 서쪽에 비하면 하나같이 꾀죄죄한 건물하며 모든 게 낙후한 것이 사실이었다. 연탄공장이 없어지기를 학수고대했던 상인들로선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노순우는 부동산 박의 행태가 역겨웠다. 역전여관을 사라고 부추길 땐 연탄공장 때문에 헐값에 집어먹을 수 있다고 꼬드기지 않았나. 게다가 역전여관이 낡은 탓에 값을 후려칠 수 있는 데다 별채는 거저먹는 거라고 헛바람을 불어넣었고.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여관 영업이 번창하리라고 호언장담한 게 부동산 박이었다. 부동산 박의 예언은 적중했다. 야간 통행금지가 풀린 지 3년으로 접어드는 내내 투숙객이 늘어났다.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한밤중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집에서 잘 줄 알았던 노순우로서는 부동산 박의 사업 감각에 혀를 내둘렀고. 그 부동산 박이 이번엔 여관을 팔라고 설레발치다니, 배신감에 불끈한 노순우는 흙손을 시멘트 바닥에 패대기치며 소리쳤다.

“나, 역전여관 안 팔아!”     



역전여관과 얽힌 잡음이 엇박자를 놓기 시작한 건 생맥줏집 앞에 코털 마네킹이 출현하고 나서였다. 영하 13도 강추위가 몰아친 어느 날, 연탄재를 쌓아둔 생맥줏집 출입문께 코털이 두드러진 남자 마네킹이 홀연히 등장했다. 누가 봐도 생맥줏집 최를 닮았음을 한눈에 알만했다. 이웃 상인들과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은 그 마네킹이, 머지않아 어디에서 왔는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나브로 사람들의 호기심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고. 게다가 생맥줏집 수호신을 자처하는지, 코털 마네킹은 돌장승처럼 그 자리에 붙박인 채 꼼짝을 안 했다. 생맥주 최가 코털 마네킹을 옮기려고 눈이 뒤집힌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영업 준비도 마다한 생맥주 최는, 두 팔로 힘껏 밀쳤다, 장도리로 발꿈치를 뿌리째 뽑을 듯 기를 쓰고 흔들어 댔다, 별별 짓을 다 해보았다. 코털 마네킹은 움직이지 않았다. 생맥주 최는 마네킹을 없애야만 장사도 하고 얼굴 들고 다닐 수 있으리라 작심한 모양이었다. 그는 가죽 잠바를 벗고 코털 마네킹을 처치하는 데 본격적으로 덤벼들었다.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입소문은 생맥주 최에게 통하지 않았다.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며 플라스틱 마네킹을 붙들고 낑낑대는 그의 행동이 별쭝맞긴 했다. 팔과 윗몸으로 마네킹과 격렬하게 얼크러져서인지 몰라도 시간이 갈수록 묘하게 산 사람을 붙들고 씨름한다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문제는 코털 마네킹이 미동도 안 한다는 거였다. 얼어붙었을까 봐 마네킹 발치에 펄펄 끓는 물을 끼얹었지만 허연 김만 무럭무럭 피어오를 뿐 놈은 끄떡도 안 했다. 


보다 못한 노순우와 상조회 회원들이 합세해 마네킹의 머리 배 다리를 밀어붙였어도 강력 접착제로 붙인 듯 한치 흔들림이 없었다. 급기야 마네킹 허리에 밧줄을 걸어 잡아당기던 구경꾼들이 나가떨어지고 나서도 생맥주 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코털 마네킹을 자신의 분신으로 착각한 걸까. 아니면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코털 마네킹을 처치 대상으로 다잡은 생맥주 최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노순우가 아는 생맥주 최는 세월아 네월아 하는 청년이었다. 가게 밖에 연탄재가 쌓여도 제때 치우는 법이 없었다. 처마 끝에 고드름이 줄줄이 달려도 내버려두었다. 가수는 원래 게으름뱅이라던 그가, 코털 마네킹 처리에는 이상 행동으로 보일 만큼 유난을 떨었다.


곡괭이로 마네킹 언저리를 파고 들어낼까도 했으나 얼어붙은 보도블록은 곡괭이 날을 번번이 튕겨냈다. 

“누구 짓인가?” “살인사건도 나지 않은 생맥줏집에 누가, 왜 코털 마네킹을 가져다 놓았나?” “혹시 생맥주 최의 자작극이 아닐까?” 이구동성 떠들어댄 사람들이 하릴없이 그의 소행으로 몰아가자, 생맥주 최는 열이 뻗쳐 억울함을 호소했다. “역전여관 마네킹만으로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구요!”




코털 마네킹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구경꾼들의 훈수가 끊이지 않았다. 성질 급한 청년이 전기톱으로 모가지를 잘라내라고 하자 생맥주 최의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냈다. “차라리 날 죽여라!” 곡괭이를 들고 청년에게 덤비는 생맥주 최를 사람들이 간신히 뜯어말렸다. 이틀 내내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였던 생맥주 최가 손 털고 무릎을 꿇은 건 해거름이었다. 마치 패배를 인정하듯 생맥주 최는 두 손 모아 빌었다. “제발 떠나주세요. 어디서 왜 오셨는지 몰라도 이쯤에서 장난 그만 치시고 조용히 사라져 주세요.” 마치 산 사람에게 하듯 경건한 자세여서 보는 이들이 숙연해질 정도였다. 마침내 생맥주 최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에 이르자 노순우는 누가 코털 마네킹을 가져다 놓았는지 심각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이 한 짓이죠?”

마네킹을 옮긴답시고 입에서 단내를 풍기던 생맥주 최가 힘에 부치고 절망스러웠던지 다짜고짜 노순우를 물고 늘어졌다. 코털 마네킹과 씨름한 지 나흘째였다. 노순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황을 동정한다고 해도 생맥주 최는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충격이 크리라는 건 이해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덤터기를 씌울 줄은 몰랐다. 여자 마네킹 때문에 여관 영업에 피해가 막심하다는 걸 아는 생맥주 최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걸 뻔히 아는 처지에 코털 마네킹을 빌미 삼아 애먼 사람을 잡으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비로소 노순우는 사태가 심각함을 알아차렸다. 생맥주 최와 코털 마네킹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려봤자 헛수고일 게 뻔했다. 경찰이 내세운 여자 마네킹에 이어 코털 마네킹이라, 뭔가 예사로 넘길 일은 아니지 싶었다. 무슨 수로 최의 오해를 푸나? 무엇보다 코털 마네킹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듣기로는 어둑새벽에 서 있었다는 둥 한밤중이라는 둥 말이 많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코털 마네킹이 나타나는 순간을 직접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네킹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스스로 어딘가에서 걸어왔을 리 없을 터.


 입 달린 사람이라면 다들 한마디씩 내뱉었지만, 코털 마네킹이 왜 생맥줏집 앞에 출현했는지는 추측만 무성할 뿐 밝혀진 게 하나도 없었다. 하필이면 왜 생맥줏집일까? 코털을 장식한 걸로 봐서 생맥주 최를 겨냥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왜, 생맥주 최인가? 구경꾼들과 이웃 상인들은 거기까지 물음표를 던졌다가도 정작 생맥주 최 앞에서는 어물쩍 넘어가곤 했다. 그거야 당신이 잘 알 거 아니냐고 생맥주 최를 몰아붙였다간 흥분한 그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 가운데 이유 불문하고, 생맥주 최가 코털 마네킹을 불러들인 원인 제공자라는 데는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생맥주 최가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한사코 뻗대더라도 말이다. 


“아우 증말 미치겠네. 왜 하필 나야? 내가 뭘 잘못했냐구!”

코털 마네킹 앞에 고개를 숙였던 생맥주 최가 문득 얼굴을 들고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울분을 토했을 때, 어이쿠 하고 가슴이 철렁한 건 노순우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여자 마네킹을 흘겨본 생맥주 최가 “형님이 복수하려고 그런 거죠?”하고 대뜸 허튼소리를 퍼부어댔기 때문이었다. 코털 마네킹을 불러들인 사람으로 몬 것도 모자라 이번엔 복수극까지? 노순우는 아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말 같잖은 소리 말라고, 목구멍까지 치받아 올랐지만, 끓는 속을 꾹꾹 눌러 삭였다. 섣불리 대꾸했다간 본전도 못 건질 게 뻔했다. 코털 마네킹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생맥주 최가 자신에게 날을 세우는 것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노순우는, 코털 마네킹 출현 사태는 말로 시시비비를 가릴 사안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뭔지는 몰라도 다른 무언가가 개입하지 않고서야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누가 코털 마네킹을 가져다 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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