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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베 Aug 08. 2024

쓰는 인간

3 소설로 지은 집

집을 집필실로 되살리는 데 힘을 쏟기로 한 나는 라면을 끓이기로 작정하고 먼저 가스레인지부터 살폈다. 물은 후 순위였다. 겨울에 집을 떠나며 수도계량기에서 호스를 떼어놓은 터라 수돗물은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재작년겨울인가, 호스를 수도계량기에 연결해둔 상태로 집을 비웠다가 경을 친 적이 있었다. 이월 말에 돌아와 마당에 구르는 호스를 보니, 호스 안에 고여 있던 물이 돌덩이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십 미터가 넘는 그 호스를 뜨거운 물에 녹이느라 반나절을 허비했다. 둥글게 만 호스를 물이 끓는 양은솥에 넣었다가 꺼내기를 되풀이하며 얼음을 녹여야 했다. 부엌에 처박혀 그 짓을 하고 있자니 어찌나 부아가 치밀던지! 그날 호스에서 얼음을 빼내느라 가스통 하나를 다 비웠다. 한 해를 써도 시원찮은 가스를 그까짓 얼어붙은 호스를 녹이느라 몽땅 허공에 날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참에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지난겨울 집을 떠날 때 잊지 않고 수도계량기에서 호스를 떼어놓았던 터였다. 


수돗물 걱정은 잠시 뒤로 미루고 라면은 생수로 끓이면 그만이었다. 가스레인지를 점검할 차례였다. 넉 달 만에 손대는 가스레인지가 온전히 작동할까. 의구심을 누르며 나는 점화 스위치를 켰다. 그러나 불꽃이 피어나지 않았다. 퍼런 가스 불이 힘차게 넘실대야 하건만 점화 스위치를 연거푸 돌려도 가스 불은 살아나지 않았다. 가스 밸브를 좌우로 돌려봐도 점화 스위치만 헛돌 뿐 가스 불은 불꽃을 드러낼 생각을 안 했다. 가스가 떨어질 리 없었다. 가스 한 통을 들여놓으면 팔 개월에서 일 년은 너끈히 버텼다. 


어림짐작으로 작년 십이월에 들여놓았으니 가스는 넉넉할 거였다. 빌어먹을 가스레인지라니! 애꿎은 가스레인지에 짜증을 내면서도 나는 속으로 몹시 당혹스러웠다. 특유의 내 기계 울렁증이 발동한 탓이었다. 컴퓨터나 전기톱, 세탁기 따위에 손을 댔다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곤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암담함이라니! 내 손이 닿으면 고장 나기 일쑤인 기계치 후유증이 엄습하면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끔찍한 증세가 덮친 건가. 


나는 먹통 가스레인지 앞에서 망연자실했는데, 이따위 사소한 일에 일상이 헝클어지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 자신이 끔찍하도록 싫었다. 가스레인지는 어디가 고장 난 걸까. 이런 막막한 상황에 부닥치면 기계치인 나는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다. 기계치, 기계치, 일상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지독한 기계치는 이런 꼴 당해도 싸다고 자신을 타박하던 내게 퍼뜩 떠오른 게 가스통이었다. 부엌 바깥벽에 세워둔 가스통을 왜 생각 못 했을까. 혹시 그 새 가스가 새 나가버리기라도 한 걸까. 


나는 부리나케 부엌 문턱을 넘어 부엌 바깥벽으로 내달렸다. 열 걸음도 안 되는 그 거리가 어찌나 멀던지! 그러나 기역 자로 꺾어지면 곧장 눈에 띄어야 할 가스통이 안 보였다. 가스통이 있어야 할 자리엔 잡풀이 수북했다. 가스통이 없어지다니! 누군가 훔쳐 간 건가? 그러지 않고서는 지붕 처마 밑 부엌 벽에 붙어 있어야 할 가스통이 사라질 리 만무했다. 원래 가스통이 있던 자리 곁에는 빈 병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부엌 바깥벽엔 중간에 끊어진 가스 호스만 축 늘어져 있을 뿐 가스통도 빈 병도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비로소 사태 파악을 할 수 있었다.      



“가스통을 훔쳐갔다구요?”

농협 가스 배달원 사내는 현장을 보고도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나의 설명을 듣고 나서 별의별 해괴망측한 일이 다 벌어진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스통을 내다 팔면 사, 오만 원은 받을 거라며 빈집으로 알았을 거라고, 나름 넘겨짚었다. 배달원 사내는 가스 배달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라고, 적선한 셈 치라고 나를 위로했다.

“그래야죠, 아무한테나 벌어지는 일이 아니니까.”

“잊으세요. 신경 써봤자 속만 끓이죠. 한 푼 적선했다 치시고 싹 잊으세요.” 가스통을 짊어진 사내가 시원스레 말했다. 

“별수 있습니까, 잊어야죠. 웬만한 사람한테는 한 번도 안 생길 겁니다. 나 정도 되니까, 전기도 나가고 가스통도 없어지고 희한한 일이 연거푸 터지네요.”

“전기도 나갔어요?”

“전기뿐이겠습니까? 쇠스랑, 호미, 도끼도 깡그리 없어졌네요.”

“그래요?”

배달원 사내가 가스 호스와 가스통을 연결하는 밸브를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근데, 이건 왜 안 가져갔을까? 신주인데. 팔면 몇 푼 될 텐데.”     



빈집에 생명을 불어넣을 자격이 내게 있는 걸까. 

전기 없이, 암흑천지에서 이틀 밤을 보낸 다음 날이었다. 전기요금 냈다고 끊어진 전기가 절로 들어오나?문득, 물음이 터졌고, 그러지 않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나는 그때까지 전기요금을 내면 한전에서 요금 납입을 확인하고 알아서 전기를 연결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마냥 손 놓고 있다고 전기가 들어올 리 없음을 깨달은 나는 즉시 그저께 밤에 휴대 전화 불빛에 의지해 살폈던 굴뚝이 있는 바깥벽으로 향했다. 아뿔싸! 계량기가 뜯겨나가고 없었다. 계량기가 있던 자리는 거뭇한 자국만 뚜렷했고 계량기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밤에 내가 손댄 것이라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구식 누전차단기였다. 전기 계량기가 없어진 걸 알아채지도 못하고 전기요금 냈다고 태평스러운 하루를 허비했다니, 이러고도 오래 묵은 집에 깃든 인물들에게 낯을 들 수 있을까.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전기요금 영수증을 찾았다. 정전을 대비해 불온 농협 마트에서 사 온 양초를 밀쳐낸 나는 부랴부랴 영수증을 들고 한전 충주지사 전화번호를 눌렀고, 기계음이 몇 차례 오간 다음에야 안내원 목소리를 귀에 담을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단전됐고, 한시라도 빨리 전기를 연결했으면 좋겠다고, 집 주소를 불러주고 전기요금을 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안내원은 은행 지로로 요금을 내면 입금 확인을 하는 데만 이삼일이 걸린다고,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나. 참담했다. 암흑천지에서 또 하루 이틀을 더 견뎌야 한다고? 노트북도 못 켜고 냉장고도 못 돌리고 반찬도 없이 계속해서 라면으로 때워야 한다고? 


한여름에 냉장고 없이 살 수는 없었다. 나는 방법이 없겠냐고 안내원에게 사정했다. 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안내원이 방법을 일러주었다. 충주 한전에 영수증을 가져오거나 팩스로 보내면 된다고. 이 땡볕에 충주 한전까지 영수증을 가져간다?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활개 치는 세상에서 신석기인도 아니고 종이 영수증을 손에 쥐고 길을 나선다? 불볕에 나섰다간 십 분도 못가 비지땀에 목욕할 터였다. 강산마을에서 앙성면까지 가는 버스는 세 시 반 차가 있었다. 설사 그 버스를 타고 앙성까지 간다고 해도 다시 충주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충주에 도착해서는 한전을 찾아야 하고. 전기요금을 내자고 그 먼 길을 가야 하나? 이거야 원 아예 여행길이 아닌가. 아무리 시간을 가늠해 봐도 그건 무리였다. 더는 어둠 속에서 막걸리를 수면제로 마시고 밤을 보낼 수는 없었다. 오늘 밤 안으로 무슨 수를 쓰든 전기가 들어와야 했다. 그렇담 남은 건 팩스였다. 하지만 노인들만 사는 강산마을에 팩스가 있을 턱이 있나. 


그때 내게 기적적으로 떠오른 게 노인요양원이었다. 목사 아내인, 전직 간호사가 운영하는 노인요양원이라면 어엿한 공공기관이 아닌가. 거기엔 틀림없이 사무용 팩스가 있을 거였다. 다행히 나는 목사 부부와 안면을 익힌 사이였다. 강변 산책길에도 자주 인사했고, 사택에 가서 식사한 적도 있었다. 일요일에는 서울에서 온 신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은 적도 있었다. 전기요금 영수증을 집어 든 나는 곧장 요양원으로 달렸고, 마침 이동 목욕 차량으로 재가 환자를 돌보고 온 원장은 몇 달 만에 봤음에도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집에 전기가 나갔음을 설명했고, 원장은 팩스 사용을 기꺼이 허락했다. 그녀는 아예 자신이 직접 보내겠으니 나에게 팩스 번호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불러준 번호를 원장이 눌렀음에도 팩스는 신호가 안 갔다. 두 차례 실패를 거듭하자 원장은 내게 영수증을 달라고 했고, “끝자리가 73이 아니라 37이네요.” 하고 내가 불러준 팩스 번호가 틀렸음을 잡아냈다. 지겨운 기계치여! 이 판국에도 실력 발휘를 하다니! 

“집에서부터 외웠는데도 그러네요.” 

“그러게요, 작가들은 다 그런가요?” 

원장은 웃으며 팩스 번호를 눌렀다. 잠시 뒤, 팩스가 작동하는 신호음이 울렸고, 나는 한전 충주 지점에 전기요금영수증이 무사히 들어갔음을 확인했다. 

“이제야 전기가 들어오겠네요.” 

나는 한전에 전화를 걸었고, 담당자와 통화했다. 그리고 곁에서 기다리는 요양원 원장에게 말했다. “오후 늦게라도 전기를 연결해주겠답니다.”      



저녁 일곱 시가 지나서였다. 전봇대에 올라갔다 온 전기기사가 계량기를 설치했음을 알려주었다. 전기 스위치를 올리자 방에 불이 들어왔고, 냉장고가 돌아갔다. 전기밥통에 묵은쌀을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저녁을 먹는데 개구리 합창이 집을 덮쳤다. 늦은 밤 나는 전등을 끄고 촛불을 밝혔다. 비로소 집 구석구석이, 살자 살자고, 삐걱대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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