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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대상

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22편

by 곰탱구리



"하하하하하하~"

미친 것 같은 성중이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니까 너가 손 잡으려고 하니까 이선희 구급사가 놀라서 도망갔다는 거 아니야?"

"아니 그렇게 앞 뒤 다 잘라먹고 이야기하면 내가 무슨 변태 같잖아. 그게 아니고 김명주 씨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손을 떨면서 두려워하길래 진정시켜 주려고 손을 내밀었다니까? 그런데 선희 씨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그래 알았다. 알았어. 니 소심해 빠진 성격에 변태는 좀 아니지. 쫌생이 짝 사랑 남이라면 몰라도"

"야! 너 자꾸 놀릴 거야?"

"아냐. 아냐! 그만할게. 근데 너 진짜 다른 의도는 정말 일도 없었냐? 뭐 걱정, 관심, 사랑 이런 거. 크크크"

계속되는 성중이의 놀림에 화가 난 H가 자리를 피하기 위해 나가려는 순간 막 사무실로 들어오던 팀장이 한마디 했다.

"H! 네가 조금 이해해. 이선희 구급사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

"예? 무슨?"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냥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라. 너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만 알면 돼"

H는 고개가 갸웃거렸지만 김명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있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을 접었다.




"아이 씨발!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되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사람을 계속 가둬 두냐고?"

"이봐요 김명주 씨! 현황 증거는 차고 넘치는 데 여자분이 김명주 씨 탓이 아니라고 적극 부인하니까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내보내 드리는 겁니다. 폭행에 유산까지 시켜놓고 뭘 잘했다고 큰 소리입니까?"

"증거 있어? 내가 때렸다는 증거 있냐고?"

"여자분의 몸에 난 상처, 당신 손톱에 잔뜩 남아있을 여자분의 DNA, 비명소리, 주변 이웃들의 증언... 증거야 넘치고 넘칩니다만, 폭행이 반의사 불벌죄에 해당되는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니 조용히 기다리세요"

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김명주는 남동 경찰서 조사실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너무도 뻔뻔스러운 태도에 담당형사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씨발! 법이 정말 뭣 같네. 증거도 확실하고 더구나 현행범인데 반의사 불벌죄는 무슨... 딱 봐도 여자가 겁에 질려서 고소 못하는 것인데. 저런 새끼는 감옥에서 평생 썩게 만들어야 되는데, 참 더럽네요 법이란 거"

"송형사는 이럴 때 보면 좀 감상적이야. 이런 일 하루 이틀 보냐? 쓸데없이 높으신 분들이 만드신 법에 시비 걸지 말고 쇠사슬 살인범이나 잡으러 가자고. 범인 안 잡을 거야?"

"아뇨. 그놈도 잡아야죠. 아니 근데 저 김명주란 놈도 그놈 못지않게 나쁜 놈이라서 욕이 절로 나오는 것을 어쩝니까?"

"오지발도 아주 태평양이네. 니 일이나 잘하세요. 나와 임마! 임현지 씨 전 애인 소재는 파악되었냐?"

"네 팀장님! 그런데 그놈 지금 인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대리 운전하다가 2개월 전에 술에 취한 여자 손님을 폭행하고 강간시도를 하다가 잡혀 들어가 있습니다."

"뭐? 그럼 그놈은 아니라는 이야기네. 에이씨! 수사 방향을 다시 잡아야 되네. 암튼 임현지 씨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탐문부터 해봐. 난 사건 현장 주변의 CCTV 다시 한번 조사해 볼 테니까. 아! 그리고 막내한테 현장 주변 차량 블랙박스 조사 좀 해보라고 해. 뭐라도 찾아봐야지"

"금전 문제도 아니고 치정도 아니면 도대체 뭘까요? 보험 가입한 것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고 서로 연락하는 친구도 하나 없습니다. 현장을 보면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인데 뭐 특별한 동기가 될 만한 건더기가 하나도 없으니 이거 좀 막막합니다."


송형사의 말을 듣고만 있던 박찬유 형사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렇네. 동기가 없어, 동기가. 피해자인 임현지 씨는 상습 폭력의 희생자인 데다가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심리 치료를 받고 있고, 공장 다니면서 겨우 연명하는 신세였으니 돈은 절대 아니고, 현 남친 말고는 트라우마 때문에 따로 만나는 사람도 없었으니 치정도 절대 아니야. 폭력 전 애인 놈은 현재 구치소에 갇혀 있어서 알리바이가 확실하니 범인이 아니고. 그럼 뭐지? 그럼 누구지? 쇠사슬에 신너에 페인트까지... 준비가 철저한 것으로 보아 최소 이틀 이상 정성스럽게 준비한 계획범죄임은 분명한데.... 사이코패스? 아니면 묻지 마 살인?'

박찬유 형사는 점점 자신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박형사의 퀭한 눈이 성의 없이 지나쳐간 모니터의 영상 속에서 당일 범행 현장에서 1km 떨어진 이화공원에 주차한 그랜저 HG 차량에 찍힌 H의 뒷모습이 아주 짧은 시간 비췄다 사라졌다. 아쉽게도 박팀장이 H를 인식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팀장님! 거 CCTV 몇 번이나 돌려봤는데 뭘 또 돌려보세요?"

"이거 말고 다른 방법 있어? 이거라도 돌려보고 또 돌려봐야지. 혹시 알아 자꾸 보다 보면 뭐라도 나올지?"

"에휴, 내가 CCTV나 보려고 강력계에 지원했나 자괴감이 생기네요."

"닥치고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나 다시 가져와봐. 처음부터 전부 다시 검토해 보자고"

박팀장은 송형사가 가져온 사진을 화이트보드에 현장의 Layout에 맞추어 붙였다. 그러고는 곰곰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방 내부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던 송형사는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손으로 마구 비볐다.

"다 시꺼멓게 그을려서 뭐 볼만한 게 뭐 있어요? 쇠사슬 말고는 볼 것도 없는데. 으으! 지금도 그 방의 그 끔찍한 냄새가 몸에서 나는 것 같아요. 사람 타는 냄새가 그렇게 지독할지 몰랐어요. 노린내라 그러나? 으으으 끔찍해!"

"송형사! 저기 방구석에 있는 신너 하고 페인트 통 확인해 봤어?"

"네? 아! 페인트 통이요? 신너 하고 페인트 모두 정일도료라는 중소기업 제품이고요 정왕동 시화공단에 있는 업체인데 지금은 소방시설 미비로 휴업 중입니다. 페인트는 건축용 유성도료로 건물 외벽 도포하는 데 사용하는 도료라고 하네요. 도료에 시너를 넣어 희석시켜서 사용한답니다. 뭐 사용하다 남은 거 아닐까요?"

"근데 왜 방에 있는 거지? 보통 이런 거는 창고 같은 데에 따로 보관하지 않나?"

"범인이 가져다 사용한 것 아닐까요?"

"그럼 놈이 이 집에 미리 와서 페인트가 있는 것까지 다 확인해 봤다는 거잖아. 너 가서 한 달 전 CCTV부터 다 가져와. 우리가 가져온 일주일치 말고 나머지 다"

"에휴! 눈알 빠지겠네. 한 달 치를 다 살펴보려면 장난이 아닐 텐데... 죽겠네요."




'흠! 더 이상 구월동 쪽은 어렵겠네. 어디로 가지? 김명주 커플을 빨리 모셔야 하는데. 이수진이라고 했나? 그녀야 말로 진짜 천사인데. 구원을 위한 장소가 필요한데 이제 구월동은 어려울 것 같고..... 흠, 대부도 쪽에 버려진 컨테이너가 많으니 그쪽으로 한번 가봐야겠네. 지난번에 사 두었던 오토바이에 신너와 페인트를 싣고 다니면 바로 사용할 수도 있고.... 참! 쇠사슬도 챙겨야지.'

H는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때였다. H의 등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모니터에 흐릿하게 반사되어 보였다. H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어머! 깜짝이야 놀래라! H 씨 제가 오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이선희 구급사였다. 이선희 구급사는 놀라서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H를 바라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늘 구급팀 회식 있는데 도와주셔서 고맙다고, 우리 팀장님께서 혹시 오실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셔서요"

"회식이요? 아.... 그...."

"혹시 다른 약속 있으세요? 아니면 오세요. 비록 삼겹살이지만 같이 술 한잔 해요. 네?"

해맑게 웃는 이선희 구급사의 얼굴을 보며 H는 도저히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 오늘은 내가 쏜다. 마음껏 먹고 기분 풀자고. 자! 건배"

"팀장님! 그럼 오늘은 소고기 좀 먹어도 됩니까? 소방팀의 H 소방사도 참석하셨는데"

"야! 좀 봐주라. 내 사정 잘 알면서 소고기는 좀 힘들다. 삼겹살로 만족하면 안 되겠냐? 그래도 맥주는 무제한 제공한다. 맘껏 마셔"

"에이 팀장님! 이 집 맥주 무한리필 집이에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 마셔!"

구조팀의 회식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팀원 수가 적어서 그런지 매우 가족적이고 서로 친밀하였다. 분위기에 취해서일까? H는 평소보다 술을 급하게 마셨다. 취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H는 갑작스러운 흡연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게 옆 골목길로 나갔다. H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고 라이터 돌을 힘 있게 눌렀다. '틱틱'이는 소리와 함께 여러 번의 시도가 무색하게 불꽃만 튀길 뿐 실제로 불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때 옆에서 갑자기 불이 쑥 하고 들어왔다.


"이선희 구급사님 원래 담배 피우셨어요?"

이선희 구급사는 술에 취해 게슴츠레한 눈으로 H를 바라보다 라이터를 쭉 내밀며 건들거리며 서 있었다. 불붙은 라이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H는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술 때문에 호흡이 원활하지 않았던 H는 '후'하는 소리와 함께 담배연기를 힘껏 내뱉었다. 덕분에 가슴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H를 잠시 바라보던 이선희 구급사는 H의 옆으로 다가와 주머니에서 새롭게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불을 붙였다. 깊게 내쉬는 한숨에 무언가 어두운 슬픔이 묻어났다. 이선희 구급사가 라이터에 불을 켜는 순간 H는 그녀의 오른 손목에 깊은 상처가 나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상으로 보이는 상처였다. 잠깐의 순간이었기에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지만 얼핏 보기에도 흉터가 꽤 깊어 보였다.

"H 씨 괜찮으세요? 구급팀 사람들도 늘 피와 죽음을 가까이하다 보니 한번 마셨다 하면 죽자고 마셔요."

"이해합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과 가까운 사람들이다 보니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쉽지 않죠. 사는 게."

"주량에 맞게 드세요. 먼저 들어갈게요."

"네 저는 한대 더 피우고 들어가겠습니다."

H는 새로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이선희 구급사의 손목에 난 상처에 대한 생각에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담배를 쥐고 있는 손가락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H는 손 끝에 매달린 담배를 보았다. 거의 필터만 남고 다 타들어가 있었다. 한숨을 한 번 쉬고 꽁초를 검지 손가락으로 스냅을 주어 털어냈다. 동그란 불꽃이 앞쪽에 떨어지며 여기저기로 불씨가 날리었다. '자나 깨나 불조심'이란 어린 시절 포스터 문구가 갑자기 떠오르자 H는 헛웃음을 지으며 확실하게 끄기 위해 앞으로 두어 발자국 걸어가 발로 불씨를 확실하게 밟았다. 밟았다. 그렇다. 분명히 불씨를 발로 밟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불씨가 발에 밟히지 않고 바닥이 밑으로 푹신하게 꺼져 들어가며 발목이 땅 속에 파묻혀 버렸다.

'어? 이게 뭐지? 왜 발이 푹 꺼지는 거지? 누가 스펀지라도 버렸나?'

H가 발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에 바닥을 살펴보기 위하여 허리를 굽혔다.


바로 그 순간, 이미 밟아 껴졌다고 생각했던 담배 불똥이 발 밑에서 환한 빛을 내며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으헉'하는 소리와 함께 무의식적으로 발을 들어 올리자 균형을 잃은 상체가 뒤쪽으로 넘어갔다. H는 뒤로 넘어질 것을 염려하여 반사적으로 팔을 뒤로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몸은 뒤로 넘어지지 않았다. 담배 불똥을 밟고 있던 발이 알 수 없는 힘에 붙잡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여파로 H의 몸은 뒤가 아닌 옆쪽으로 뒹굴게 되었다. 발목에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몸은 옆으로 뒹구는데 발은 바닥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하니 발목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H는 아픔과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당황하여 발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환한 빛에 휩싸여 있던 발아래서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불길은 다섯 갈래로 퍼져나가더니 사람의 손과 같은 모양이 되어 H의 발목을 붙잡고 서서히 올라왔다.


손이 보이고 팔이 보이고 어깨가 보이더니 드디어 얼굴의 반쪽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신성정밀 화재 때 죽은 사장이었다. 원한이 가득히 담긴 눈 빛으로 H를 쏘아보며 천천히 지옥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상반신이 지상에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의 몸을 갖추고 강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지옥의 사자 그 지체였다. 공포에 질린 H가 발을 빼내려고 힘을 주자 지옥에서 올라온 불덩어리가 입을 크게 열고 비명을 질렀다. 도저히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비명이 아니었다. 불지옥에 빠진 악마들이 내지를 법한 끔찍하고 괴상한 소음이었다. H는 눈을 감을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었다. 몸이 마비된 듯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덩어리는 천천히 기어올라 H어 얼굴 근처까지 올라왔다. 그러고는 두 팔을 들어 올려 H의 어깨를 내려치기 위해 힘차게 휘둘렀다. 이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H가 마지막 힘을 짜내 불덩어리의 공격을 막으려고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방어가 전혀 의미가 없다는 듯이 불덩어리는 H의 팔을 통과하여 오른쪽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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