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23편
"어휴 씨발 놀래라! 뭐야? 왜 그래? 나야 나 성중이!"
"헉헉! 아냐 아무것도"
"뭐 나쁜 짓이라도 했냐? 뭘 그렇게 놀라냐?"
"아니라니까. 뭐 좀 깊이 생각하고 있는데 니가 갑자기 어깨에 손을 올리니까 놀란 거지. 미리 기척이라도 내던가 하지"
"하이고. 내가 몇 번이나 너를 불렀는데. 아무 대답도 없이 멍하게 앉아 있었던 게 누군데?"
"알았다. 미안하다. 들어가자"
H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성중이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가게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갔다. 혼자 꿍얼거리던 성중이도 터덜거리며 가게 쪽으로 걸어갔다. 뒤쫓아 걸어오던 성중이는 H의 어깨에 손을 올려 어깨동무를 하였다. H는 그의 어깨에 올려진 성중이의 손을 한번 보고 고개를 더 돌려 불덩어리가 솟아 나왔던 골목길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두운 골목길을 외로이 비추는 가로등 만이 서 있었다. 그러나 H와 성중이가 가게로 들어가는 순간 아무것도 없던 골목길에서 작은 화염이 피어올라 비웃 듯이 잠시 일렁거리며 H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강제로 우기다 시피하여 퇴원한 이수진은 집으로 가는 내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김명주의 눈을 피해 급히 이사를 가야만 했기에 급하게 퇴원하였다. 이수진은 오피스텔 입구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둥 뒤에 숨어서 로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김명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그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에 들어갈 때까지는 운 좋게도 김명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수진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신발장에 있는 캐리어를 모두 꺼냈다. 급하게 손에 잡히는 대로 옷과 세면도구 들을 마구잡이로 캐리어에 쑤셔 넣었다. 한참 짐들을 캐리어에 넣고 있는 도중 갑자기 '띡띡띡띠'하며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이수진의 몸은 공포에 질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져 버렸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망부석이 되어 오직 문 쪽만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굳어져 있었다. '띠리릭'하는 절망적인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김명주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사람만은 아니기를 절실히 기원했던 바람이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다.
"자.. 자.. 자기야~!"
김명주는 이수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더욱 기괴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이수진에게 다가갔다.
"일찍 퇴원했네? 왜 전화 안 했어? 내가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아냐. 자기... 그래... 자기 힘.. 힘들까 봐 그랬어. 나 혼자... 퇴원해도 되니까. 나 혼자서도 잘하잖아"
"그래 우리 허니. 잘했네. 그래도 이 오빠는 좀 서운하네. 오빠한테 의논도 없이 혼자서 막 결정하고..."
"잘못했어 오빠. 내가... 내가 오빠... 힘들지 않게 하고 싶어서... 그래서. 잘못 생각했어. 다신 안 그럴게"
"근데 어디 가려고? 가방은 왜 다 꺼내놨어?"
"아냐 오빠... 이거 그냥 정리하는 거야. 응. 싹 정리하고 청소하려고... 그런 거야. 오빠...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 무서워... 내가 다 잘못했어. 제발 이렇게 빌께. 때리지만 말아줘. 용서해 줘."
"이런 씨발년. 내가 괜히 널 때렸어? 니가 내 속을 매일 썩이니까 손이 나가는 거잖아. 그리고 그게 때리는 거야? 그냥 사랑하니까 정신 차리라고... 그러니까 그게 뭐냐? 그래! 사랑의 매. 그거잖아! 암튼 이년이 아직 교육이 안 됐어. 넌 좀 더 교육을 받아야 인간이 돼"
"아~악!"
"입 다물어. 지금부터 니년 입에서 아주 조그만 소리라도 나오는 순간 그때부터 내가 정말 깡패가 되는 거야."
김명주의 눈빛이 야비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손에는 미리 준비한 1m 정도 크기의 단단한 참나무로 만들어진 환봉이 들려있었다. 그 악마 같은 미소로 입꼬리가 점점 올라 갈수록 여자의 신음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꼭 막은 채 김명주가 내려치는 환봉에 온몸을 맞길 수밖에 없었다. 김명주가 그녀에게 가하는 폭력의 소리는 오피스텔의 얇은 문짝을 뚫고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냉담하고 차가운 복도는 그 모든 소리를 무관심하게 꿀꺽 삼키고만 있었다. 다만 이수진의 방문 밖에서 서 있는 하나의 검은 그림자 만이 이 모든 소리를 들으며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명주의 미소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미소가 그의 입에서 얼굴 전체로 피어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방 안에서 새어 나오던 소리가 서서히 잦아지기 시작하고 남자의 두런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잠시 후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H는 재빨리 그 집을 지나쳐 다른 집 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H는 자신 앞에 있는 집의 벨을 눌렀다. 김명주는 그런 H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휘파람을 불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H가 벨을 누른 집에서 '누구세요?' 하는 힘없는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인터폰을 사용할 줄 모르는 노인이 문 앞에서 방문자의 정체를 물어보는 것 같았다. H는 일부러 크게 말했다. 이 집은 엘리베이터에서 ㄱ자로 꺾여있는 구조라 보이지는 않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소리는 충분히 들리기 때문이었다.
"네! 여기 김수철이 집 아닌가요?"
"누구? 김수철? 아닌데 잘못 찾아왔어"
"아! 네. 죄송합니다."
H는 발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김명주는 이미 내려가고 없었다. H는 이수진에 대한 납치 방법을 고민하며 엘리베이터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띠리링'하고 들렸다. H는 혹시 하는 마음에 이수진의 방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역시나 이수진의 방문이 열려있었다. 그러나 문만 열렸을 뿐 나오려는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H는 조심스럽게 문으로 걸어갔다. 이수진이 방 안쪽의 문고리를 잡은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H는 이웃 거주자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나가며 이수진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는 김명주의 심한 폭행에 거의 정신이 나가 있었다. 코와 입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불안증으로 두 손은 덜덜 떨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세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으...119...119...에 전화.."
"상태가 너무 안 좋으신데 119는 늦을지도 모르니까 제가 병원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이쪽으로 기대세요."
H는 이수진의 팔을 어깨를 걸치고 일으켜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리고 갔다. 이수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H에게 이끌려 갔다. H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엘리베이터 앞에 설치되어 있는 CCTV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손을 머리 뒤로 올려 후드를 앞쪽으로 푹 뒤집어쓰고 고개를 푹 숙인 뒤 Down 버튼을 꾹 눌렀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바로 위층에 머물러 있었기에 얼마 기다리지 않고 바로 내려왔다.
거의 쓰러지려는 여자에게 차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여자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가방에서 차키를 꺼내 H에게 주며 지하 2층이라고 말했다. H는 지하 2층 엘리베이터 입구에 이수진을 내려놓고 차를 가지러 갔다. 잠금장치를 여러 차례 눌러 그녀의 차를 확인한 뒤 엘리베이터 입구로 차를 몰고 갔다. H가 도착했을 때 이수진은 이미 정신을 완전히 잃고 쓰러져 있었다. H는 끙끙거리며 이수진을 뒷좌석에 싣고 차를 몰아 대부도 쪽으로 향했다.
"씨발! 어디 간 거야? 이 개 같은 년. 전화도 안 받아? 아주 죽고 싶어 지랄을 하는구나. 내가 매를 아낀 게 문제였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씨발 내 눈에 띄기만 해 봐라. 이번에는 걷지도 못하게 다리를 분질러주지. 씨발 전화받으라고"
김명주는 미친 듯이 리다이얼을 눌러댔다. 전날 이수진을 폭행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와 술을 진탕 마시고 오후까지 퍼져 잔 뒤 다시 오피스텔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방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의 핸드폰과 차키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그녀는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받을 수가 없는 것이었으나 김명주가 알 턱이 없었다. 10번 이상의 시도에도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자 김명주는 방구석에 놓여있던 환봉을 집어 들어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책상 위의 있던 주황색의 작은 스탠드가 깨지면서 사방으로 유리 조각이 튀었다. 방구석에 있던 빨래 건조대가 부서지며 널어놓았던 빨래가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혼자 한참을 난리를 치던 김명주는 편의점으로 내려가 소주와 안주를 사 와 병나발을 불었다.
"씨발년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이번에 잡히면 정말 죽여버린다."
김명주가 소주를 2병 넘게 마셨을 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거나하게 술이 오른 그는 거의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씨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바라본 핸드폰 화면에는 '허니'란 이름이 떠 있었다.
"씨발년아! 너 지금 어디야? 어디 있어? 빨리 말해라! 아니면 정말 이번에는 뒤진다"
"그 씨발년. 과연 지금 어디 있을까?"
핸드폰에서는 이수진이 아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구? 너 누구야? 너 누군데 수진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거야? 이 씨발새끼야 빨리 대답 안 해?"
"내가 누구인 게 중요해? 아니면 이수진이 어디 있는지가 중요해?"
"뭐야 이 씨발놈아? 개소리 말고 지금 수진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죽여 버리기 전에"
"아이고 무서워라. 이거 어디 무서워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겠나? 그럼 죽기 전에 얼른 말해야 되겠네. 여기 대부도 바닷속으로 펜션 202호야!. 상동람사스 습지 전망대 바로 앞에 있는 펜션이지. 자! 알려줬다. 이제 어쩔 건데? 니 까짓게 뭘 할 수 있는데?"
"뭐? 이 개새끼야? 너 거기서 딱 기다려. 내가 가서 아주 연놈 둘 다 죽여버릴 테니까"
김명주는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1층의 한 구석에 새워놓은 오토바이에 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평일 12시 다되어가는 시간이라 시화 방조제를 통행하는 차량은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김명주는 음주운전임에도 불구하고 사고 없이 대부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구봉도 입구를 지나쳐 가는 순간 할머니 칼국수 57호 가게 앞에 주차하고 있던 차 한 대의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오토바이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김명주가 상동 람사스습지 전망대 쪽으로 가기 위해 주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뒤를 따라오던 차도 산길을 따라 쫓아왔다. 김명주는 백미러를 통해 차를 힐끗 쳐다보았다. 차와 오토바이의 간격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김명주는 오토바이를 길 옆쪽으로 비키면서 속도를 줄였다.
"씨발! 내가 술만 안 마셨어도 양보 따위는 안 하는 건데. 그 개 같은 연놈들 만나서 힘도 써야 하고 ㅋㅋㅋㅋ. 시발 운 좋은 줄 알고 얼른 지나가라"
그때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차도 김명주의 오토바이를 따라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엔진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뒤 따라오던 차가 풀 액셀을 밟고 오토바이를 향해 황소처럼 돌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