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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걸음

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21편

by 곰탱구리


"잘못했어요. 오빠 내가 잘못했어. 제발"

"이 씨발XX! 그 새끼하고 무슨 이야기했어? 시시덕거리까 좋아? 아주 깨가 쏟아지더구먼"

"아냐! 아냐!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내가 힘들어 보이니까 분리수거 도와주신 거야. 그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이야 오빠!"

"그러니까 왜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분리수거를 도와주느냐고? 왜? 분리수거하는 척하면서 손이라도 잡아줬어? 아니면 가슴이라도 만져주디?"

"무슨 소리야? 아냐 정말 그런 일 없었어. 오빠 나한테는 오빠 밖에 없어. 알잖아 오빠도"

"이 미친년이 어디서 약을 팔아? 그 새끼가 너 안아 주는 거 내가 여기 베란다에 서서 이 두 눈으로 분명히 봤는데 어디서 거짓말이야? 왜 그 새끼를 다칠까 봐? 보호라도 하려고?"

"아냐 오빠. 애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배에 통증이 와서 내가 쓰러지니까 그 사람이 잡아 준거였어. 진짜야. 오빠. 제발 믿어줘"

"지랄하고 있네. 이 썅X이. 넌 아주 남자에 환장한 년이잖아. 왜 내가 질려? 이제는 그 새끼 꼬셔서 살림이라도 차리려고? 니가 나한테서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이 씨XX아. 어디 한번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봐."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감싸 쥐고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워있는 여자의 몸을 마구 짓밟고 있었다. 여자는 두 손과 무릎으로 배를 보호하느라고 온몸을 속절없이 남자에게 내주고 있었다. 여자의 간절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폭력은 그 강도가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다. 남자는 발로 차는 것으로 만족을 못했는지 본격적으로 여자를 깔고 올라타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거의 정신을 잃어갈 때쯤 갑자기 원룸의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손을 멈추었다.

"시발~! 누구야? 너 그놈 불렀냐?"

".........."

여자는 거의 기절한 상태여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두두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김 명주 씨! 문 여세요. 안에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빨리 문 여세요. 안 그러면 부시고 들어갑니다."

"이런 씨발! 니가 신고했냐?"

"내... 가... 그럴.. 시간이.... 나... 있어... 었어?"

"그럼 씨발 누구야? 에이씨 귀찮게 됐네... 침대로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있어. 안 그럼 아주 죽여버릴 거니까, 찍 소리도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았어?"

여자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힘들게 몸을 일으켜 침대로 갔다.


"김 명주 씨. 문 안 열면 부시고 들어갑니다."

"나가요. 잠시 기다려요"

김 명주는 마치 자다 일어난 듯한 포즈를 취하며 뚱한 표정으로 문을 살짝 열었다. 경찰은 문지방에 발을 살짝 집어넣어 김 명주가 문을 닫지 못하게 조치를 취한 뒤 고개를 쭉 빼고 방안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김 명주는 매우 귀찮다는 듯이 경찰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성이 폭행당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요. 문 좀 활짝 여세요. 혼자 계신가요? 다른 사람은 없나요?"

"폭행이요? 그런 일 없어요. 여자친구가 자고 있어요. 그냥 조금 말다툼한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이 오해하신 듯합니다.

"여자분 좀 깨워주세요. 정식으로 신고가 들어온 사건이라 확인이 필요합니다."

"자는데 뭘 확인까지 합니까? 자기야! 손 흔들어 봐줘. 못 믿으시겠다니까."

"김 명주 씨, 잠깐만 비켜주세요.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경찰 두 명이 원룸 안으로 들어와서 한 명은 여자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걸어갔고 한 명은 김 명주의 앞을 막고 섰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잠시 일어나 보라고 요청하였다.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이불을 들추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경찰은 고개 좀 들어봐 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여성이 고민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가에 붉은색의 핏멍과 여기저기 피가 튄 자국이 보였다. 김 명주 앞을 막고 있던 경찰은 그녀의 핏멍을 보더니 남자를 원룸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김 명주는 못 나가겠다고 버텼지만 경찰은 강압적으로 끌고 나갔다. 원룸의 문이 딸깍하는 소리를 내며 잠기자 남아있던 경찰이 여자에게 물어보았다.

"괜찮으세요? 얼굴의 상처 저 남자가 그런 것인가요?"

"............"

경찰을 쳐다보던 여자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을 뒤집으며 스르륵 넘어졌다. 경찰은 다급히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하여 경동맥 쪽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 침대의 아래쪽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엉덩이 쪽에서 계속해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찰은 급히 무전기를 들었다.




붉은 눈과 마주 보며 공포에 떨고 있던 H가 정신을 차린 것은 긴급 출동 사이렌 덕분이었다. 화재 출동이 아닌 구급출동의 사이렌이 울려 퍼지자 H에게 다가오던 붉은 눈동자가 바닥으로 무너져 바닥으로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붉은 눈동자가 내뿜는 지독한 원한과 원초적인 증오감에 H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사라지자 H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몸은 온통 땀으로 범벅되어 옷까지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멍하니 주저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상황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구급대원인 이선희였다.

"H 씨! 긴급출동인데 다른 직원들이 모두 출동 중이라 사람이 없어요. 구급지원 좀 부탁드려요."

"예? 에예예"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가요?"

이선희 구급대원이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자 H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H는 원룸에 도착해서야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배곧에 위치한 유호오피스텔 A동 805호의 문을 열자 피비린내가 확 흘러나왔다. 정면에 보이는 침대에 파리해진 낯빛의 여자가 죽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피멍과 붓기로 다소 기괴해 보였다. 침대 옆에는 경찰관 2명이 엎드려있는 젊은 남자의 등 위에 올라가 무릎으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남자는 분함을 참느라고 씩씩거리며 거친 호흡을 연신 내뱉고 있었다. 구급용 침대의 뒷부분을 잡고 있던 이선희 구급요원이 침대를 방안으로 힘주어 밀었다. H는 그 힘에 방 안으로 딸려 들어가게 되었다.


경찰의 에스코드 덕분에 근처 시화병원으로 이송하는데 불과 1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응급실에 도착한 이후에도 한동안 여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응급실 밖에서 이선희 구급대원은 피로 물든 구급차를 걸레로 닦고 있었다. H는 울렁거리는 속을 담배로 달래기 위해 흡연실로 걸어갔다. H가 담배를 두 가치째 피우고 있을 때 의사 두 명이 흡연실로 들어왔다. 방금 응급실에서 H가 이송한 여자를 맡았던 레지던트였다. 두 사람은 담배를 물고 깊이 빨아들였다 내뿜었다.


"에휴 저 여자분 불쌍해서 어쩌냐?"

"글쎄 말이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던데... 애까지 유산되었다고 하던데..."

"안구 파열에, 유산에, 갈비뼈 3개 부러진 것은 부상 축에도 못 껴. 제일 위험한 부분이 정신적인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것 같다던데? 우울증으로 확대되면 정말 위험해질 텐데...."

"어떤 새끼인지, 어떻게 여자를, 그것도 임산부를 저렇게 될 때까지 때릴 수 있지? 저건 사람새끼가 아니야. 아주 짐승 새끼야. 짐승새끼"

"말세다 말세야. 귀신들은 뭐 하고 있는지? 저런 놈들 싹 다 잡아가지 않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H는 갑자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두 사람. 벌레새끼. 고난당하고 있는 천사. 폭력의 절정.... 그래 이거야. 그녀는 진짜 천사야. 벌레와 함께 구원을 시켜줘야 해. 구원의 조건에서 내가 간과한 게 있었어. 벌레를 함께 태워야 하는 거였어.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까 하늘에서 두 사람을 보내 주신 거야. 그래 맞아. 일단 두 사람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아야겠어. 그리고 이번에는 철저히 준비해서 이번에는 반드시 구원에 성공할 거야'


소방서로 돌아와 일지를 정리하는 H에게 이선희 구급대원이 캔커피를 뽑아 들고 다가왔다.

"H 씨!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요. 이거는 감사에 대한 포상입니다."

"감사합니다. 별 것도 아니었는데 뭘 포상까지요? 제가 받아 본 포상 중에 제일 크고 좋은 포상이네요."

"에이 별것도 아닌데요. 따뜻할 때 드세요."

"네. 근데 오늘 출동한 구조자 신원 확인 되셨나요? 저도 소방일지에 기재해야 하는데..."

"아! 그거 메일로 쏴 드릴게요. 여자분 참 안 됐어요. 몸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던데... 근데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그 남자, 불구속 수사 한다고 하더라고요. 여자분이 폭행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네요. 아마도 남자가 복수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 같던데. 경찰들이 폭행 장면을 직접 본 것은 아니라서 여자의 진술이 없으면 구속이 어렵다는 것 같아요"

"아무튼 법이 아주 지랄이에요.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를 주기 바쁘니...."

H는 법에 대하여 신랄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얼굴로는 남모를 미소를 지었다. 혹시라도 남자가 구속되기라도 하면 구원의 시간이 그만큼 늦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었다. 그 고민이 깨끗하게 해결된 것이었다. 순간 H의 눈에 캔 커피를 들고 있는 이선희 구급사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H는 이선희 구급사의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H의 손이 이선희 구급사의 손에 닿는 순간 이선희 구급사는 화들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단말마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 서슬에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소란한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사방이 조용해지며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이선희 구급사를 쳐다본 H는 그녀의 눈에서 깊은 공포와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심연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모든 것을 검게 물들이는 원초적인 불우한 감정들이 눈망울 속에서 일렁거렸다. 당황한 이선희 구급사는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고 H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멍하니 남아서 모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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