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20편
"임마~! 세상 살다 살다 졸다가 샤워부스에 넘어져 다친 놈은 처음 본다. 아니 밤에 잠 안 자고 뭐 했냐? 여자라도 생겼냐? 아님?"
"아이 시끄러워~! 그냥 넘어졌다니까 하긴 뭘 해?. 크게 다친 거는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간단히 치료만 하고 바로 들어갈게. 손만 조금 찢어진 거니까 대충 몇 바늘 꿰매면 돼. 팀장님한테 말이나 잘해줘"
부스 유리가 깨지면서 넘어진 H는 왼손에 8 바늘이나 꿰매는 큰 상처를 입었다. 새벽에 급히 응급실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팔목에 있는 화상도 발견하고 치료를 해주었다. 집에 돌아온 H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꿈이 아니었다. 단순한 환영도 아니었다. 깨지지 않고 남아있는 유리의 한 부분에 엄마의 데스마스크 형상이 오래된 물때처럼 때처럼 선명한 자국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나를 '살인자'라 부른 것일까? 천사 1호는 아니 천사가 아니었지. 임현지 그 년은 그렇다 치고 엄마는 왜 나를 살인자라 부른 것이지? 난 분명히 구원자인데,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구원자인데 왜 나를 살인자라고 하는 거지? 왜지? 엄마까지? 도대체 왜?'
자기만의 생각 속으로 한없이 침잠하던 H가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분노를 폭발했다.
"임현지! 이 개 같은 년. 음탕한 탕아 같은 년. 사악한 뱀의 독 보다도 더 악독한 것 같으니... 천사도 아닌 벌레 같은 년이 감히 천사인 척을 해서 나를 헷갈리게 만들어? 감히 구원자인 나를? 어쩐지 불을 붙일 때도 그렇게 발광을 하더니. 알아봤어야 하는데 바보같이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역시 난 아직 너무 모자라. 이번엔 사실 너무 사전 조사가 부족했어. 조급한 마음에 대충 조사하고 선택한 것이 문제였어. 그래 그러니 엄마가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래도 좀 그렇기는 하네."
혼란스러움에 빠져 들었다. 머릿속에서 살인이라는 단어가 쉴 새 없이 떠 올랐다.
"구원을 위한 행동이었을 뿐인데 왜 살인이라고 하지? 그게 어째서 살인이지? 임현지 그년은 천사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축에도 끼지 못하는 벌레였을 뿐인데, 해로운 벌레를 죽여 없앤 것이 왜 살인이지? 난 살인자가 아니야. 씨발! 난 살인자가 아니라고. 그지 같은 년 하나 때문에 엄마가 날 살인자로 생각잖아. 이런 씨발 X 같은 년."
H는 화장실의 벽을 주먹으로 쿵쿵 내려쳤다. 붕대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상관하지 않고 계속 분이 풀릴 때까지 그의 주먹질은 계속 이어졌다.
"에이씨 오늘 정말 왜 이러냐?"
담장을 폴짝 뛰어넘은 박팀장은 하필이면 다양한 종류의 항아리가 묻혀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항아리의 뚜껑은 박팀장의 몸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쨍그랑'하는 커다란 소음과 함께 조각조각 깨지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덕분에 박팀장은 벌러덩 넘어졌으며 항아리에 남아있던 간장을 온몸에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 결과 박팀장은 근처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뜨끈한 탕의 온기가 몸 전체에 퍼져나가자 지난밤을 꼬박 새웠던 박팀장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였다.
"팀장님! 미친놈이겠죠? 몸에 쇠사슬을 채우고 산채로 불을 질러 죽이고 또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 분명해요."
"미친놈이지. 완전히 미친놈인 데다 완전히 위험한 놈이지. 차라리 완전히 미쳐서 미친 티가 나면 찾기라도 편할 텐데 겉으로는 완전히 정상적인 미친놈이라 문제지. 연쇄살인이 될 가능성이 높아"
"예? 연쇄살인이요? 설마요?"
"아냐! 현장에서 느낀 것인데 놈은 꽤 치밀한 놈이야. 더 찾아봐야 하겠지만 그 근방에 설치된 CCTV의 어느 곳에서도 놈의 모습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어. 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놈이지. 그런데다 쇠사슬이며 페인트며 미리 현장에 준비해 놓았던 것들이야. 사전에 계획을 했던 것이지. 화재가 심했기는 하지만 현장 근처에 놈의 족적 하나 없었어. 옆집에 남겨진 족적 말고는... 이성균 씨가 우연히 놈을 보지 않았다면 그 족적이 범인의 족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을 거야."
"담 뒤에서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현장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던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두 가지 중 하나겠지. 이성균 씨가 혹시나 불을 꺼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지켜본 것이었거나, 피해자가 불에 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즐기려고 했거나. 난 두 번째라고 확신한다. 이 개자식, 아무래도 단순 살인자가 아니야. 사이코패스에다 방화에 집착하는 정신병자 새끼인 것 같아. 현장에 아무런 감정이 없어. 피해자에 대한 원한도 살인에 대한 흥분도 전혀 없었어. 냉정하고 마치 그냥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무언가 이질적인 흥분이 퍼져있는 느낌이야. 무슨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한 번으로 끝날일이 아닌 것 같아. 빨리 잡지 않으면 위험해"
"어떤 놈일까요? 족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키 170cm, 몸무게 70kg 정도의 남성 정도입니다. 신고 있는 신발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안전화 종류로 보입니다. 담장에서 찾은 빨간 실리콘 조각은 작업용 장갑에 서 찢겨 나온 것인데 범인의 것으로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이성균 씨도 누군가 있었다는 것만 느꼈지 직접적으로 본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범인을 특정 지을 수 있는 증거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단한 놈이네요"
"일단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져야 원한이건 치정이건 방향성이 잡힐 것 같군. 일단 신원 밝혀지는 데로 바로 움직여 보자고. 근데 옷은 다 말랐냐?"
목욕을 마치고 나온 박팀장은 무인 세탁소에서 뽀송하게 말린 옷들을 챙겨 입었다.
"에이! 그 뭐냐? 향기 나는 것 좀 넣고 세탁하라고 했잖아. 까먹었지?"
"아뇨 그게. 500을 추가로 넣어야 되더라고요. 하필이면 현금이 없어서..."
"카드는 국 끓여 먹었냐? 없으면 나한테 달라고 하던가?"
"장가를 가세요, 장가를. 홀아비 냄새 향기 나는 세제로 가리고 살지 마시고요"
"니가 병풍 뒤에서 향냄새를 맡고 싶어 안달이 났지?"
"아이! 머리 좀 그만 때려요."
박팀장은 입이 댓 발 나온 송형사에게 운전대를 넘기고 사무실 본인 자리에 털석하고 기대앉았다. 안락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7만 원 주고 구입한 개인 의자라 나름 편안함이 느껴졌다.
"팀장님 구월동 방화 피해자 신원이 나왔습니다. 이름 임현지, 34세 여성, 직업은 신선식품에서 생산직으로 근무 중이고, 전과는 없고 데이트 폭행 피해자로 최근까지 인천 남동지역 해바라기 센터에서 보호 대상자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집은 박촌 쪽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신원이 금방 특정되었어?"
"한쪽 손은 피부조직까지 싹 다 타버렸는데 다른 쪽 손은 꼭 움켜쥐고 있었던 탓에 지문이 남아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근데 데이트 폭행 피해자였다고? 가해자는 누구였어?"
"이름 김문석, 나이 36세, 직업 무직, 폭력전과 말고도 절도 및 사기 전과도 2개나 있네요. 이 자식 집이 시흥입니다. 사건 현장하고 30분 거리네요. 바로 수배 들어갈까요?"
"그래 일단 집에 가보고 없으면 집 근처에서 잠복해. 핸드폰 통화내역 따고. 그리고 임현지 씨 집은 내가 갈 테니까 변동사항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그리고 막내한테 임현지 씨 회사에 갔다가 해바라기 센터도 들러서 김문석 외에 접근했던 사람이나 최근에 특이한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해. 일단은 김문석을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해 보자고"
"H야! 좀 괜찮냐? 어디 봐봐. 에구 제법 많이 다쳤네. 몇 바늘이나 꿰맨 거야? 바보냐? 도대체 샤워하다 말고 뭔 짓을 했길래 강화유리가 깨져버리냐?"
"시끄러워. 하긴 뭘 해? 유리가 중국산이었나 보지"
"암튼 애도 아니고... 팔까지 다쳤는데 출동할 수 있겠냐?"
"성중아! 안 그래도 부탁 좀 하려고 했는데, 오늘만 출동조에서 좀 빼줘라. 손이 좀 아프네. 소방 호수 잡는 것까지는 좀 어려울 것 같아."
"알았다. 알았어. 이 형님이 잘 말해볼게."
오늘 하루 상황실에서 근무하게 된 H는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모두가 출동 나가고 상황실이 조용해지자 H는 락카에서 '구원의 성경'을 꺼내와 기록된 이름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에서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있는 '황'까지 살펴보았으나 죽은 임현지 보다 더 적당한 후보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이런. 가장 적합하다고 느껴졌던 임현지 조차 천사가 되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은 임현지 정도는커녕 후보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네. 대상자를 다시 찾아봐야 되겠네. 휴~! 진짜 천사를 어디서 찾지?"
H가 구원의 성경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을 때 후배인 영철이가 컵라면에 물을 부어 들고 상황실로 들어왔다. H는 다이어리를 얼른 덮어 책상에 넣고 영철이가 내미는 컵라면을 받아 들었다.
"형님~! 이야기 들었어요? 어제 구월동 재개발 구역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실화가 아니고 계획된 방화였다고 하더라고요. 여자 시신이 하나 나왔는데 쇠사슬에 발이 채워지고 산채로 태워졌데요. 남동 소방서하고 경찰 애들 완전히 뒤집어졌어요. 그쪽 재개발구역에서 얼마 전에도 노숙자 한 명 불타 죽었잖아요. 이번 사건의 살인 방법이 너무 잔인해서 광수대 애들도 투입될지 모른다고 하던데요?"
"그래? 광수대까지?"
"계획살인으로 보고 주변 CCTV 기록 영상을 싹 다 걷어가서 확인한다고 하던데, 그것도 한 달 분량을. 뭐 그게 큰 도움이 되겠어요? 그 많은 걸 언제 다 본다고...."
"근데 살인 방법이 얼마나 잔인했길래 광수대까지 투입한다는 거야?"
"쇠사슬에 묶어놓고 산채로 불태웠다고 했잖아요. 근데 형님도 아시겠지만 유성 페인트가 화력이 얼마나 높고 오래 가요. 사방에 신너와 유성 페인트를 잔뜩 뿌려놔서 사체가 거의 남은 게 없데요. 발목뼈가 다 녹아내리고 쇠사슬에서 풀려난 여자가 녹아내린 발목으로 온 방안을 돌아다녔나 봐요. 녹아내린 발목으로...."
"........."
"상상만 해도 끔찍하죠? 양발목이 녹아 부서지니까. 두 팔로 기다가 팔도 녹아버리니까 나중에는 몸으로 기어서 기어코 현관 앞에 도달해서 거기서 죽었답니다. 죽은 여자 뒤로 녹아내린 종아리 살덩어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불에 타고 있었고 발목뼈는 가루로 부서져 모래처럼 변해 있었데요. 온몸이 다 잘라져서 팔, 다리, 하체가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었답니다. 그런데 여자의 사체가 얼굴은 꼿꼿이 들고 현관을 지켜본 채로 죽어있었다고 해요. 그게 가능할까요? 보통 불에 타는 고통에 쪼그리고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죽는 게 보통의 모습이 아닌가요? 불에 타버린 온몸이 분리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
H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을 쳐다보던 완전한 붉은색의 눈동자가 갑자기 떠 올랐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던 눈동자가 서서히 변하더니 자신에게 순수한 증오와 지독한 원망을 쏟아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뒷 목에서 소름이 서서히 펴져 나왔다. 팔에 오소소 오르는 소름에 온몸이 떨려왔다.
"형. 왜 그래요? 내가 말을 너무 적나라하게 했나?
멍하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 H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끼던 영철은 그저 너무 놀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상황실을 나갔다.
사실 H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영철이의 묘사가 너무 리얼해서가 아니었다. 조잘조잘 떠드는 영철이 이 뒤편 벽에서 걸려있던 화재예방 포스터가 바람 한점 없는 상황실 내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생 대상의 포스터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그림이었다. 삐뚤빼뚤한 사각형의 건물 위에 삐쭉 솟은 머리카락 같은 모양의 붉은색 불덩어리들이 그림 속의 건물들을 태우며 점차 그림을 넘어서 벽면을 태우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녹아내리는 검은 건물의 잔해물. 그 검은 잔해물이 찐득한 엿처럼 벽면 아래로 흘러내린다. 상황실 바닥에 조금씩 고여가는 검은 잔해물. 점차 쌓여 올라간다. 꼬물꼬물 거리며 움직이던 덩어리가 서서히 모양을 갖춰가며 타원형의 구더기처럼 변한다. 그리고는 그림 속 건물 위를 점령하고 있던 두 개의 불덩어리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모양을 잡아가는 검은 잔해물 앞쪽에 떨어졌다. 두 개의 불덩어리가 떨어지자마자 검은 잔해물은 두 개의 타원형으로 분리되었고 그 타원형의 정 가운데에 불덩어리가 자리를 잡고 순수한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H 눈앞에서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