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가에 속삭이는 공포 (2-2)

함무라비아의 멸망

by 곰탱구리


이제 지구는 한 달 뒤에 점령군이 도착하기만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너무도 엄청난 소식에 지구상에서 벌어지던 모든 전쟁이 순식간에 멈추었고 강도나 사재기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인간이 정신을 차리고 착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정신적 붕괴가 일어난 탓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부 민감한 사람들의 자살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외계인을 신으로 떠 받드는 새로운 신앙이 생겨나 불길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연일 지구는 극과 극의 분위기가 펼쳐지며 혼란 속에 빠져 들었지만 다행히도 외계인의 압도적인 무력에 압도되었는지 별도의 무장 세력에 의한 혼란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두려움이 조금씩 완화되자 오히려 외계인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씩 상승하였다. 드디어 외계인이 오기로 한 날이 되었다.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외계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날따라 하늘에는 이상하게도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약속한 12시가 되기 10초 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10대 강대국의 대통령 관저 상공에 마치 공간이동을 한 듯이 쓱 하고 거대한 우주선들이 급작스럽게 출현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의 엄청난 기술력에 그저 경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몰래 지대공 미사일을 준비하고 있던 강경파들도 그저 힘없이 고개를 떨굴 수 밖에는 없었다. 우주선은 길쭉한 선형 모양의 외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길이가 약 4km 정도 폭은 1km 이상 되어 보였다. 그 거대한 크기의 우주선이 아무런 소음도 진동도 없이 하늘 위에 무중력 상태로 떠 있는 것이었다.


미국의 화이트 하우스 상공에 떠 있던 우주선의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며 작은 수송선이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화이트 하우스 광장에는 이미 미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이 단상을 만들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수송선은 바람에 날린 깃털이 땅 위에 내려앉 듯 조금의 반동도 없이 지상에 사뿐히 착륙하였다.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미 해군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하려고 하자 대통령은 손을 들어 그들의 연주를 제지하였다. 외계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매끈한 금속 표면을 가진 소형 수송선의 한쪽이 스르르 열리며 외계인 두 명이 입구에 나타났다.


외계인들은 2.5m 정도의 키에 근육으로 똘똘 뭉친 거대한 상체를 가졌으며 얼굴은 웹소설에 나오는 오크와 비슷한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둘러보더니 문의 양쪽으로 비켜서서 부동자세를 취하였다. 그러자 수송선에서 인간과 거의 유사한 외모의 중년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백악관 광장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마디로 다크 엘프와 매우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제야 대통령은 다시 손을 들어 다급히 군악대에게 신호를 주었다. 군악대는 그 신호에 맞춰 준비했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외계인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오자 우주선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에너지로 만들어진 에스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미국 대통령은 그 에너지 에스컬레이터 끝 쪽으로 걸어가 외계인 남자가 땅으로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계인은 발이 땅에 닫자마자 지구의 관습에 꽤나 익숙한 듯 오른손을 미국 대통령에게 내밀었다. 미국 대통령은 그 외계인의 행동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고 악수를 하였다. 외계인은 익숙한 영어로 자신은 티탄 제국의 은하 우주함대 사령관 ‘아울아비오’라고 소개하였다. 아울아비오는 지구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세세한 관습에 대하여도 매우 익숙하게 행동하였다. 아울아비오는 화이트 하우스 광장에 준비된 연단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 매우 여유로운 모습으로 몰려든 기자들과 카메라를 맞이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지구인 여러분. 나는 위대한 티탄 제국의 은하 우주함대 사령관이자 지구 관리 책임자 ‘아울아비오’ 사령관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티탄 제국의 힘은 지구인들이 상상할 수 있은 수준을 훨씬 상회하고 있습니다. 의미 없는 대항은 불허하며 우리 티탄 제국의 시민으로 순응하면 보다 더 행복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 나라에는 시민들의 안전과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우리의 집정관과 관리자들이 상주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지구의 각 나라의 모든 제도는 기존과 동일하게 유지토록 할 것입니다. 단, 하나 사법제도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모든 지구의 사법제도는 우리 티탄 제국의 법 집행관들에 의해 운영될 예정이며 법 집행을 위한 티탄 제국의 법전은 지구 각 나라의 언어로 제작되어 배포되어질 것입니다. 각 나라의 사법 관계자들은 배포된 법전에 따라 법을 운영하여 주시기 바라며 모든 재판은 우리 티탄 제국의 집행관들에 의해 재 검토되고 판결이 법에 따라 적용되지 않았을 경우 모든 관계자는 티탄 법에 따라 처벌될 것입니다. 뭐 크게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셔서 생업에 종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티탄 제국의 발전된 기술은 군사적으로 전용될 만한 것을 제외하고 의학, 물리, 전기, 전자 모든 분야에 걸쳐 모든 국가에 공평하게 제공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의 행복 즉 공익을 매우 중시하는 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우주선에서 내려온 티탄 제국의 관리자들은 각 나라의 사회 전반에 깊숙이 파고들어 지구의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고도로 발전된 과학과 기술력은 지구의 모든 생활을 변동시켰다. 초격차의 뛰어난 기술력에 대하여 지구인들은 호의와 감사함을 느꼈고 그에 따라 나름 순조롭게 식민지인로서 적응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구인들을 경악시킨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배포한 새로운 법전 때문이었다. 신규 법전을 연구하던 사법 관계자들은 새 법전이 이상하게도 매우 익숙한 내용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새 법전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 제1 왕조의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성문법인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명제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었다. 지구 법조인들은 그에 대하여 티탄 제국의 집행관에게 그 사실에 대해 질문을 하였고 ‘오이타칸’이란 이름의 최고 집행관이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여주었다.


아직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기 전 안드로메다 성운의 작은 티탄국이었던 시절에 추후 제국으로의 발돋움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주변 성운 중에서 생명체가 존재하는 모든 별에 비밀리에 집행관들을 파견하였다. 지구에서 선택되었던 것이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왕조였다. 초급 집행관이었던 오이타칸의 조상은 티탄국의 법률을 바빌로니아의 현실에 맞게 변형하여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함무라비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권좌를 노리던 세력들에 의해 오이타칸의 조상은 바빌로니아에서 쫓겨나 티탄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이타칸의 조상은 자신의 야심 찬 작품이 제대로 실현되지도 못하고 실패한 것이 한으로 맺혀 후손들에게 당시 만들었던 함무라비 법전을 유산으로 내려주며 언제고 지구와 유사한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면 반드시 이 법을 시행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대대로 집행관을 역임했던 오이타칸의 조상들은 적당한 기회를 엿보았으나 한 번도 식민지 집행관으로 파견되지 못하다가 오이타칸에 와서야 그 유언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오이타칸은 최고 집행관으로서 조상이 남기신 함무라비 법전을 지구의 새로운 법으로 적용하도록 강력히 주장하였다. 티탄 제국의 다른 집행관들은 시대적으로 너무 오래된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법률을 적용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최고 집행관인 오이타칸은 집안의 대대로 이어온 숙원을 이루기 위하여 티탄 제국의 상부 지도자들을 매수하는 무리수까지 두어 지구에 이 법률이 적용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지구의 사법 관계자들은 너무 과거에 만들어진 법이고 현대 사회에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반대를 하였지만 티탄 제국의 의회를 통과한 사항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1년 간의 적용 유예기간을 지낸 후 함무라비 법은 전 세계에 공통법으로 시행되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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