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잘 자기 - 수면은 과학이다.
한동안 유명했던 광고가 있다. '침대는 과학이다'라는 에xx라는 회사의 광고 copy이다. 처음 그 광고를 보았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무슨 침대까지 과학을 따지고 xx이야. 그냥 자면 되는 거지.'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어렸고 늘 잠이 부족한 나이였기에 그럴 수 있었다. 잠이 안 오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히 잘 몰랐다.
학교 가서 공부는 쪼꼼하고 쉬는 시간, 점심시간마다 교실과 운동장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녔다. 또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학교의 놀이 기구에서 혹은 고무공 하나 들고 찜뽕이라는 놀이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다녔으니 몸이 성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너무 뛰어서 옷에서 땀이 소금으로 변해 허옇게 흘러내리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집에 와서 책가방을 방에 던져 놓는 순간 다시 동네로 뛰어 나간다. 나를 기다리는 많은 동네 친구들. 오징어, 단방구, 비사치기, 자치기... 놀이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져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메아리칠 때가 돼서야 땀과 먼지로 꾀죄죄한 몰골을 이끌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찬물에 얼굴과 발만 겨우 씻고 저녁을 먹고 나면 숙제하라는 엄마의 말과 밀려오는 졸음으로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간신히 숙제라도 해 놓고 나면 9시 뉴스를 시작하는 효과음이 나오기 바로 전에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공익 방송이 tv 모든 채널에서 들려온다. 그러면 엄마는 아이들의 등짝을 때리며 자기 싫다는 아이들을 방으로 내몬다.
졸음은 몰려오고 tv를 보든 더 놀든 자기는 싫고... 잠투정에 신경질만 늘어간다. 기어코 엄마의 등짝 스매싱을 맛 보고야 눈물을 소매에 쓱 닦으며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삐져서 절대 잠자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과 눈을 부릅뜨지만 하품 두번에 5분을 버티지 못하고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러고는 다음날 잠에 취해 일어나기 싫어 엄마와 또다시 사투를 벌이게 된다.
그때 우리를 지켜보시던 할머니께서 한마디 하신다. "잘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지? 내 나이 돼 보면 알 거다." 그때는 그 말이 정말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잠이 안 와? 잠은 늘 자도 자도 모자라는 것이 잠인데?' 하는 생각으로 입을 삐죽거릴 뿐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똑같은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두 가지였다.
'맛있는 게 뭐가 있냐? 다 거기서 거기지', '잠을 푹 자는 것도 복이야!'였다. 엄마는 나이가 드시면서 불면증이 생겼다고 많이 힘들어하셨다. 결국 수면제라는 현대 과학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수면제의 힘을 빌면 4시간 정도는 편히 주무실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좀 둔한 성격이라 그런지 60이 다 되어 가는 나이지만 잠을 못 자는 경우는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밖에 발생하지 않는다.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몇 번 안 되는 불면의 밤조차 악몽으로 기억될 정도로 힘들고 고되었다. 다음 날 지끈 거리는 두통과 어깨가 부서질 듯이 짓누르는 근육통에 거의 미칠 정도였다. 만일 그런 밤이 지속된다면...... 으으으.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함에 온몸에 전율이 올라온다.
침대는 과학이 아니다. 달콤한 잠이 과학이고 의학이고 철학이다. 왜? 왜 잠이 과학이고 의학이고 철학일까? 우선 잠이 왜 과학인지를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유튜브를 켜서 잠 잘 자는 법이라고 검색해 보라. 수많은 저명한 과학자, 의사, 유튜버들이 자신만의 방법을 침 튀기며 설명해 줄 것이다. 왜 의학인지 알고 싶다면 당장 네이놈을 검색해 보라. 당신을 달콤한 잠으로 빠지게 해 주겠다는 의약품인 듯 가장한 수십, 수백 종의 보조제가 1+1부터 30% 할인 등의 다양한 가격표를 가슴에 달고 늘어서 있을 것이다.
자! 마지막으로 잠이 철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만약 불면증에 걸렸었다면 아마도 독약 대신 수면제를 달라고 간청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유레카라 외치지도 못한 채 따스한 욕탕 속에서 잠들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잠 자체가 철학은 아니지만 어떤 철학자라도 불면증에 걸리게 되면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달콤한 몽마를 맹신하는 사이비 교주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과거 사람들은 잠을 죽음의 일부이라고 여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잠을 통해 죽음을 멀리 떨어진 공포가 아닌 삶의 가까운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잠을 위해 누은 잠시의 시간은 아마도 생각이란 것을 죽어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것저것에 대한 생각과 하루를 반성할 수 있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해주는 최적의 시간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시간들은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고 밤의 어두운 장막 속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만들어 준다. 그것이 철학의 시작이고 발전의 밑거름이라고 생각한다.
잘 자는 방법에 대하여는 나보다 똑똑하고 잘난 과학자, 의학자, 유튜버들이 수많은 방법을 이야기해 놓았을 테니 여기서는 깊은 논의는 피하고 싶다. 굳이 말하자면 잘 먹고, 적당한 활동을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배고프면 잠이 오지 않는다. 너무 많이 먹어 배가 더부룩해도 잠은 잘 수가 없다. 침대 밖을 벗어나지 않고 하루 종일 버티면 오히려 몸은 축 늘어지고 잠이 멀리 달아나 버린다. 그러나 잡을 수가 없다. 축 늘어진 몸이 도망가는 잠을 어떻게 잡을 수가 있겠는가?
시간에 쫓겨 허덕이는 직장인이 오랜만에 부리는 게으름은 피곤을 풀어준다. 그러나 시간이 남아나는 은퇴자의 경우 게으름은 버릇이 되고 일상이 되고 독이 될 수도 있다. 피곤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독이 몸속에 점차 쌓이게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독은 밤에 잠을 멀리 던져버리고 불규칙한 생활을 만들어 버리는 주범이 된다. 아침마다 일어나지 못하고 살해당한 시체처럼 침대에 자빠져 있게 되어버린다. 하루의 불 규칙한 생활은 다음날의 피곤을 부르고 그 피곤은 다시 다음날의 불 규칙한 생활을 낳고 그 불규칙함은 구약성경의 첫 줄처럼 줄줄이 피곤과 불규칙한 생활을 불러온다.
이러한 독은 단순히 피곤이라는 유해물질에 멈추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나이 들 수록 이러한 유해물질이 면역력 감소라는 불치의 병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잠은 낮 동안 힘들었던 장기 들고 근육에 휴식을 주고 영양분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준다. 그래서 잠이 중요한 것이다. 당신을 노예처럼 부려 먹으면서 쉬지도 못하고 밥도 안 준다면 제대로 살 수 있겠는가?
잠은 먹지 않는 보약이다. 특히 은퇴를 하고 규칙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넘어 방종까지도 가능한 경우 직장 생활을 할 때보다 잘 자는 것은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많이 자는 것이 아니라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