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봉인 4
아내가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검은 눈동자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며 재순의 눈가에 점차 흰자위가 물들어 갔다. 너무도 놀라 아내는 손을 덜덜 떨며 엉덩이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재순은 영문도 모른 채 아내를 달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재순을 보며 더욱 놀라 경기를 일으키며 베개를 들어 재순을 마구 때렸다. 재순은 흠칫 놀라서 잠시 물러섰고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대치하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일곱 살짜리 아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엄마의 비명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놀란 마음에 방으로 달려온 것 같았다. 아내는 얼른 달려가 아이를 끌어안고 마구 눈물을 흘렸다. 아이는 엄마를 따라 울었고 방안은 한순간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 순간에도 재순의 얼굴은 무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오히려 냉소적인 미소가 싸늘하게 피어났다. 특히 아들을 바라보는 눈에는 붉은 핏발이 솟아올라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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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은 매우 순조로웠다. 남자는 약속한 것보다 준비를 꼼꼼하게 했다. 기중기까지 구비되어 있는 500t급 배가 푸른 파도를 가르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조타실에서 나와 갑판에 있는 재순에게 와인을 내밀었다. 재순은 와인을 받아 들어 한 모금을 들이켰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이 기분이 계속 지속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물론입니다. 잠시 후에는 더 많이 기분이 좋아지시게 될 겁니다. 수많은 황금덩어리를 눈앞에 두고 건배를 하게 되실 겁니다.”
“오!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제안이군. 프랑스산 ‘샤토 오존 2017’이네. 한 병에 백만 원이 넘지. 물론 네가 약속한 것을 충실히 지켜준다면 돌아갈 때는 한 병에 천만 원이 넘는 와인을 먹게 될 거야. 물론 반대의 경우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
“당연한 말씀입니다. 대표님께서 이렇게 꼼꼼히 준비해 오셨는데 빈손으로 갈 리가 있겠습니까? 걱정 마시고 그 천만 원짜리 와인이나 딸 준비 하십시오.”
“그래 아주 기쁜 소리군. 자! 이제 우리의 목적지에 대하여 말해줄 때가 되지 않았나?”
“소령도라는 섬입니다. 인천항에서 9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령도라는 섬과 형제 섬인데 둘 다 무인도죠. 가끔 낚시꾼들만 올뿐 방해꾼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 배의 속도가 한 35노트 정도이니까 한 시간 반정도 걸리겠군요.”
“좋군. 도착할 때까지 맘껏 즐기라고. 난 잠시 쉬어야겠어.”
대표는 와인을 재순이 옆에 내려놓고 선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재순은 와인 병을 들고 간판에 있는 비취의자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따스한 햇볕에서 달콤한 잠에 들었던 재순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항상 대표를 따라다니던 보디가드 창남이다. 놈은 줄곧 재순이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항상 재순이를 쳐다볼 때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봐! 일어나지. 소령도에 도착했다.”
“이 좌표를 선장에게 전해줘.”
“이곳인가?”
창남은 무당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몸에 배어있는 향냄새를 놀리는 친구들을 주먹으로 패주면서 깡패로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채 계의 큰손으로 불리는 지금의 대표를 만나기 전까지는 잔챙이 깡패에 불과했으나 회사의 성장과 함께 대표의 전담 보디가드로 자리하게 되었다. 고지식할 정도의 충성심과 더불어 신기하도록 잘 들어맞는 그의 ‘감’ 때문이었다. 이어받은 핏줄 덕분인지 창남은 놀라울 정도로 불운을 피해 갈 수 있었다.
그가 대표의 보디가드가 된 것도 그 감 덕분이었다. 초창기 대표는 기존 대형 경쟁업체의 대대적인 숙청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표를 죽이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창남은 기막히게 위험한 길을 피해 갔다. 처음 한, 두 번은 대표도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그 우연이 계속되자 창남을 믿게 되었다.
특히 부산에 출장 시 그의 고집으로 예약한 숙소를 바꾸었고 그날 밤에 경쟁업체의 패거리가 칼로 무장하고 그 숙박업소를 초토화시킨 것을 다음날 알게 되었을 때 대표는 창남이를 항상 자기 옆에 있도록 조치하였다. 비록 신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핏줄에 들어있는 무가의 피가 그를 지켜주고 있던 것이었다. 재순을 처음 보았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지난번 사무실로 왔을 때부터 이상하게 위화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뭐라고 딱 꼬집어 이야기하기 힘들었기에 대표에게도 아직 말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창남이가 느끼는 감각은 단지 위화감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창남이의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재순에 대하여 알려고 하거나 재순이 하려는 일을 방해하면 죽여버리겠다고 미지의 존재가 위협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창남은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무서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재순이를 볼 때마다 온몸의 털이 바짝 일어나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그냥 눈빛 하나만으로도 입이 굳게 닫혀버리고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00t 이상의 압착기에 눌려버리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가슴에서는 위험하다고 피하라고 절규하는데 머리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도망칠 수도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그저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