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의 힘

<19년 살아본 보고서> 8.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 3

by 문현호

'영재고'라고도 불리는 경기과학고등학교에서 2학년이 된 저는 낮은 성적 문제와 애착 불안 문제를 동시에 마주했습니다. 자존감은 무너지고, 마음의 안식처는 무너졌으며,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8장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에서는 제가 그 우울증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어떻게 자존감과 행동력을 되찾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열쇠 2, 일기

두 번째 열쇠는 일기입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저는 중학교 3학년부터 일기를 쓰고 있었어요. 동생의 추천에 따라 어떤 ‘일기 앱’을 처음 설치하고 일기를 적어보니, 이게 생각보다 재밌었습니다. 그때는 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그 사실을 아주 뼈저리게 알고 있었죠. 그래서 일기장에 하루 정도 있었던 일을 적어봤는데, 그게 의외로 재밌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일기를 잘 쓰지 않았습니다. 거의 주에 한 번, 그것도 길어봐야 500자 정도로 짧은 일기밖에 없었어요. 학교에서 있었던 일, 좋아하던 상대가 보인 반응이나 주변 친구들 이야기, 복잡하게 꼬인 상황 같은 걸 짤막한 글로 적는 것뿐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때 쓴 일기들은 문법이나 내용도 잘 맞지 않았고, 쑥스럽다는 이유로 사람 이름이나 상황 설명도 제대로 적지 않았더군요.

일기를 쓰는 습관은 고등학교 1학년에도 이어졌습니다. 저는 정서가 힘들수록 일기를 많이 적었고, 그래서 2학기에는 일기 작성 빈도가 높아졌어요. 일기의 내용은 점차 상황 설명과 스스로의 생각, 의문 정리가 나뉘는 잘 짜여진 구조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내용도 점점 길어지고, 생각과 의문의 표현도 점점 확고해진 것 같아요. 지금 그때의 일기를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저는 일기를 재미로 썼습니다. 일단 일기에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재미가 있었어요. 그리고 이후에는 막상 일기를 쌓아놓고 나서 나중에 보면 재밌는 것 같아서 더욱 일기를 쓰게 되기도 했습니다. 유튜브나 애니메이션처럼 ‘수동적인’ 느낌도 들지 않아서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일기들이 쌓이는 것을 보면 보람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는 일기를 순수하게 재미로 쓸 수 있었죠.

재미로 쓰기 때문에 딱히 의무감이나 정해진 일정도 없었습니다. 매일 하나씩이나 주에 몇 개 이상 같은 규칙 없이, 그냥 생각이 나거나 여유가 생기면 일기 앱을 켜고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하루 일이나 상황만이 아니라, 어제 일도 적고 싶으면 한 일기에 같이 적고, 시간 순서가 헷갈리면 헷갈린다고 적고, 그런 식이었죠. 기숙사나 집에서 잠들기 전에 잠깐, 아니면 수원에서 일산까지 오는 버스에서 남는 시간동안 심심할 때 하는 취미 생활에 가까웠어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 일기 쓰기를 심심풀이로 즐겼습니다.


하지만 일기 쓰기는 다른 기능을 더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일기는 문제를 적다 보면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해주는 기능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 신기한 기능은 심한 우울과 불안에 빠져있는 이때의 저에게 아주 긍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 기능의 원리를 간단히 설명드릴게요.

문제 상황 하나를 생각해볼게요. 이때 저는 딱히 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생각’해보죠. 일단 세상이 너무 무섭고, 노력한 게 무시당한 것 같고, 이런 성적밖에 내지 못하는 나라면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고, 친구들을 이기지도 못 하면 그들에게는 모든 기회를 빼앗길 것 같고, 나는 그들을 어떻게든 이길 수가 없는 것 같고, 내가 한심해 보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한심할 수밖에 없고, 그런 세상이 너무 무섭고... 너무 복잡하네요.

생각은 쉽게 복잡해집니다. 상황의 구조나 인과관계를 분석하려면 여러 요소를 순차적으로 고려해야 하는데, 우리의 머리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딱 하나의 개념만을 겨우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개념이 연달아 떠오른다면, 먼저 떠올린 개념이나 상황은 잊어버리게 될 거에요. 당장 제가 전화번호를 다섯 개 외우라고 하면, 절대 우리 머리는 그 모든 숫자를 한 번에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런 생각을 글로 적고 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복잡하게 휘날리면서 뿌옇게 보이던 생각은 이제 눈 앞에 글로 남게 돼요. 그렇게 문제 상황이 명확하게 보이면 몇 가지의 원인이나 해결책이 떠오르게 됩니다. 이때 그 몇 가지의 내용을 적고 나면, 다시 그 상황에 대한 원인이나 해결책 등이 떠오르게 될 거에요.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 보면 오히려 1시간 고민한 것보다 5분 정도 글로 적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일기는 그런 고민을 가볍게 적고 답변을 빠르게 얻기에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일기는 메모와 달리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설명하듯이 적게 되고, 그렇게 잘 서술된 문제는 다른 관점과 해결책을 떠올리게 하니까요. 그것도 휴대폰처럼 가까운 곳에 고민을 적을 곳이 있다는 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고민을 글로 적으면 다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표현이에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도 일기를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이미 일기의 전체 텍스트 분량이 책 7권 분량을 넘었어요(책을 완성한 시점에서는 이미 그 2배를 넘었습니다).


다시 2020년 2월, 제 상태가 가장 안 좋았던 고등학교 2학년 직전으로 돌아가볼게요. 저는 그때도 가끔 일기를 적고 있었습니다. 초반에는 멍청한 짝사랑을 이어갔던 저에 대한 실망이라던가, 그나마 있었던 이벤트인 설 연휴 이야기라던가, 아니면 불안한 상태로 잠을 자다 보니 이상한 꿈을 많이 꿔서 그 꿈의 이야기를 적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저는 제가 가진 불안에 대해서도 일기에 조금씩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제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일기에 적었습니다.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매우 우울하다.’ 그러자 참 신기하게도, 감정을 글로 적었을 뿐인데 그 감정이 나아지는 것이 느껴졌어요. 왜일까요? 누군가에게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기분이라 그랬던 걸까요? 아니면 막상 글로 적어보니 별 것 아닌 단순한 한 마디 말에 불과해 보여서 그랬던 걸까요? 확실한 것은 감정을 적을 때마다, 그래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는 겁니다. 일단 글로 적어놓고 보니, 그건 글 속의 화자의 감정이지, 제 감정처럼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그 아래에 적어보았습니다. ‘날씨 때문일까? 하늘이 온통 뿌옇다.’ 저의 감정이라는 상황을 글로 적어보니,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만든 이유가 궁금했어요. 보통은 이렇게까지 우울함을 느끼지는 않았으니까요. 그 다음 내용은 이랬습니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 그건 제 무의식에서 나온 말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제 스스로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불안과 우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물론 모두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은 아니에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충분한 휴식을 통해 가지고 있던 상처가 아물어야 했고, 그 뒤에야 저는 그 상처의 근원에 있는 불안을 천천히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한 달 정도는 지나고 나서야, 점차 저는 제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불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제가 고민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 불안은 단순했어요.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물론 지금 저는 상당히 큰 실패를 했죠. 저를 좋아한다는 사람도 없었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성적도 바닥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노력을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부족하다’는 식으로 모욕당했으니까요. 노력만큼은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니, 그 충격이 커다랬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지금까지 해낸 것이 아무것도 없나요? 한 번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일단 이때까지 확인한 것을 보면, 생활기록부의 세부특성 내용은 선생님들께서 잘 적어주신 것 같아요. 하지만 성적이 너무 낮았으니, 그 내용들은 대부분 ‘졌지만 잘 싸웠다’ 같은 핑계처럼 느껴졌습니다.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부진아 취급도 받았고 많은 기회를 빼앗기기도 했으니, 성적에 관한 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봉사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은 특별한 게 없었습니다.

다만 작은 상장이 몇 개 있었습니다. 잠깐 나가려고 했던 통계 대회나 토론 대회는 모두 예선에서 떨어졌지만, 일단 나가서 받은 상이 3개 있었네요. 원래부터 상장을 많이 주는 학교였으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교내상으로는 독후감을 잘 썼다는 상 하나, 그리고 코딩 문제를 많이 풀었다는 상 하나가 있었네요. 그런데 세 번째로, 교외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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