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살아본 보고서> 8.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 4
'영재고'라고도 불리는 경기과학고등학교에서 2학년이 된 저는 낮은 성적 문제와 애착 불안 문제를 동시에 마주했습니다. 자존감은 무너지고, 마음의 안식처는 무너졌으며,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8장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에서는 제가 그 우울증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어떻게 자존감과 행동력을 되찾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일기를 쓰며 한 해를 돌아봤을 때, 저는 의외로 해낸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작은 상장이 몇 개 있었어요. 교내상으로는 독후감을 잘 썼다는 상 하나, 그리고 코딩 문제를 많이 풀었다는 상 하나가 있었네요. 그런데 세 번째로, 의외의 교외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외상은 얼마 전에 받았던 삼성 휴먼테크논문대상 은상이었습니다. 주제는 삼색제비꽃 추출물을 이용한 왕우렁이 방제 연구였어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저는 1학년 2학기 내내 ‘우렁이 연구’에 정말 열심히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주제도 찾아내었고, 실험 진행에도 시간을 엄청 쏟았어요. 그리고 그 결과가 대회 수상이라는 성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절대 작은 성과는 아니었어요. 다른 대회에서 수상한 친구들도 많았지만, 같은 논문 대회에서는 경기과학고 1학년 중 1등의 성적이었습니다.
물론 운이 좋았습니다. 연구하던 왕우렁이가 논문 발표 3달 전에 기존의 ‘우렁이 농법 지정’에서 ‘침입외래종’으로 지정되는 드라마틱한 상황이 있었거든요. 이때 왕우렁이는 지구온난화에 의해 겨울에 전부 얼어 죽지 않고 봄에 대발생하며 벼농사와 환경에 피해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희가 왕우렁이에 국내 제비꽃 단백질의 방제 효과를 확인하는 연구를 진행했던 거에요. 결과 자체가 실제 농업에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두 조합에 대해 국내 샘플을 이용한 거의 최초의 연구였을 겁니다.
이때 받은 논문대상 은상은 가벼운 상이 아니었습니다. 은상 수상 팀에게는 상금만 해도 몇 백만 원이 주어졌고, 삼성전자 본사 투어 기회와 갤럭시 워치 신상품도 함께 주어졌어요. 연구 활동 하나만으로 이렇게 많은 상품을 받게 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특히 다른 것도 아니고 현금을 받았다는 것이, 제가 처음으로 연구 하나로 쌩판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돈을 벌었다는 것이 정말 신선했어요. 게다가 은상 수상자부터는 삼성 임직원 채용에 가산점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무려 대기업에서 저를 쓸모 있는 인재로 인정해준 거에요. 성적은 크게 놓쳤지만, 생각해보면 대신에 상금과 상품과 취직 특혜는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꼭 나쁘기만 한 거래는 아닌 것 같았어요.
뒤집어 말하자면, 바로 이 연구가 제가 2학기 성적이 낮을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일단 계획에 따라 우렁이를 연구하는 과정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매우 고된 과정이었습니다. 적어도 연구 기간동안에는 1~2시간 정도의 시간과 체력을 매일 쏟아야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쏟게 된 것은 연구 활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간고사 기간과 수행평가 기간,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기말고사 기간 모두에 해당했습니다.
제 팀과 다르게 다른 친구들은 R&E 연구 활동에 이렇게 극단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쏟지는 않았어요. 보통은 처음부터 그럴듯한 연구 주제를 잡는 것도 어렵고, 그렇게 잡힌 주제가 딱히 흥미롭지 않아서 재미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저는 친구가 좋은 연구 대상을 가져와 준 덕분에 이렇게 멋진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거에요. 거기다가 성적보다 연구를 우선하는 일도 흔치 않습니다. 저는 그냥 연구가 더 재미있어서, 성적보다 연구에 더 집중했던 것 같아요.
바로 이겁니다. 저는 2학기에 시험이나 수행평가 준비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쏟지 못한 것 같아요. 제가 R&E 연구 활동에 상당한 시간을 쏟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나 저러나 바쁜 건 똑같아서 그런지 당시에는 그런 차이를 체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기를 쓰며 생각을 정리하자, 제가 가진 부정적인 상황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사고 회로에서는 이 상황이 부정적인 이유라는 벽에 ‘그래도 괜찮은 이유’가 조금씩 충돌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그냥 이 상황이 부정적이라는 생각이 반복되었습니다. 상장 하나가 고등학교 낮은 성적을 대변할 수 있을까요? 대입에서는 먹힐까요? 대학교에서 제 상장을 보기 전에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생활기록부를 읽지 않는다면 어쩌죠? 앞으로는 연구를 포기하고 성적을 올리는 것이 나을까요? 애초에 고등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성적이 나빠졌다면, 다음 성적을 올리기 전에 수업은 따라갈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점차 상황이 조금씩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주전공인 생명과학이나 화학, 문과 과목들은 연구 때문에 성적이 잠깐 낮아진 것 뿐일지도 몰라요. 다음 학기에는 어렵지 않게 회복될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제가 잘 못하는 물리학보다는 생명과 코딩 수업의 비중이 오르기 때문에 성적이 조금 더 오를 것 같아요. 물론 수학 수업은 계속 들어야 하고, 아무래도 여러 노력이나 요소의 차이 때문인지 제가 제 수학 성적을 더 높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성적이 드라마틱하게 높아질 수는 없을 거에요. 그럼 마찬가지로 대입 자체에 작지 않은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여전히 높습니다. 그 생각은 여전히 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어요.
적어도 한 가지 긍정적인 아이디어는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적어도 이 엄청난 연구에 일조할 정도의 지능과 성실함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평균보다는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는 제 극단적인 과제 집착력과 몰입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저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상황에 금이 가며 작은 생각이 튀어나오자, 그 사이로 다른 생각들이 피어나기 시작했어요. 점차 제가 만들어 낸 부정적인 상황이라는 허상은 깨지고, 진짜 핵심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으로 피어난 생각은, 그러고 보면 제가 그들보다 제가 잘 하는 것이 분명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경쟁자들이 성적에 시간을 잔뜩 써서 다른 이들이 이길 수 없는 넘사벽을 쌓는 동안, 저는 그 넘사벽을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시간을 쓰고 있었어요. 그리고 분명 그렇게 시간을 투자한 쪽에서 저는 넘사벽을 쌓고 있었을 지 모릅니다. 우렁이 연구의 경험처럼, 다른 방향으로 성과를 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라요.
문제의 핵심에 있던 것은, 제가 성적이 낮으니 나은 기회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성적이라는 것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특히 생명과학 연구 방향에서는 이미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의 괜찮은 성과를 냈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거에요.
사실 이건 성적이라는 구조 자체가 문제였던 것일 수도 있어요. 성적은 노력이 배신하는 곳입니다. 작은 규모의 상대평가 속에서 제가 성취감을 느끼려면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옆의 경쟁자‘보다’ 열심히 해야 해요. 분명 그 과정에서 노력은 성장을 만들어 움직임을 주지만, 비교 대상들이 모두 똑같이 최선을 다해서 움직이고 있다면 다 같이 성장하고 순위는 그대로니 속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죠. 그러니 아무리 노력하며 움직이더라도 상대적인 성취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분명 성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어제의 나, 과거의 자신과 비교한다면 저는 항상 빠르게 나아가고 있어요. 이렇게 보니 모든 노력은 절대 헛된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던 원자 오비탈을 이해하게 되었고, 전기력과 자기력의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고, 영어든 한국사든 실제로 지식이 증가한 건 사실이었어요. 분명 저는 성장하고 있으니, 그 결과는 언젠가 드러나고 인정을 받을 겁니다. 지금 인정받지 못하는 건, 그저 ‘고등학교’라고 하는 인정받기 어려운 체제 속에 잠깐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저는 일기라는 글을 적으면서, 스스로의 상태와 고민을 글로 표현하며 문제를 조금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글을 적으니 우울이라는 안개는 점차 걷혀갔고, 그 가운데 있던 핵심적인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문제가 구체화되면 그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고, 그럼 그 해결책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일기라는 두 번째 열쇠는 제 정서를 회복하는 데에 정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기와 같은 글을 적는 것은 또 다른 장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어요.
일기의 마지막 장점, 바로 일기를 쓰는 일 자체가 대체로 ‘건설적’이라는 겁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기는 일단 쌓일 수 있고, 그 양을 통해 보람을 느낄 수 있어요. 또한 생각을 정리하는 힘을 키워주고, 그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힘을 분명히 키워줍니다. 그래서 저는 일기를 쓰는 일을 참 좋아했어요.
일기는 글쓰기 자체의 능력을 올려주는 데에도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일기를 쓸 때 어려웠던 건 ‘복잡한 생각을 인과관계에 맞춰 한 줄의 글로 표현하는 것’이었어요. 어쩌면 이 표현 능력이 바로 글쓰기 능력의 본질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일기를 쓰며 그런 글쓰기 능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일기와 함께 고등학교 수업의 보고서나 수행평가 같은 글쓰기 과제를 통해, 결과적으로 제 글쓰기 능력은 고등학교 전후로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많이 서툴지만 이런 책까지 쓸 수 있을 정도로 말이에요.
특히 일기를 쓴다는 것은 몇 안 되는 사람이 가지는 습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기를 쓰기만 해도 다른 친구들을 조금 앞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일기가 쌓일 때마다 작은 ‘승리’를 쌓는 기분이었죠. 적어도 일기를 쓴 날은 의미 있는 일을 한 날처럼 느껴져서, 스스로에게 조금 더 효능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기 쓰기는 우렁이 연구처럼 제가 경쟁자들보다 ‘조금 더 잘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기 쓰기는 성적에 비해 적은 노력으로 작은 성과를 빠르게 낼 수 있는 쉬운 방법이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작은 성과를 내는 것이 바로 우울에서 벗어나는 세 번째 열쇠이자, 가장 중요한 열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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